100.
나는 자주 Misogyny는 여성착취로 번역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안 좋은 종류의 영화라 기록. 모든 면에서 삐뚤어졌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여성을 반복되는 죽음으로 단죄 + 개도시키고 그 다양한 죽음의 면면들을 포르노적으로 묘사함. 물론 반듯하고 이성적이고 조금 너드스럽지만 구원하는 남성 케릭터는 덤이고.
모든 여성 케릭터가 너무나 납작하여 정말 덧붙일 말이 없는.
이런 영화가 작고 알차며 아이디어가 좋다, 라는 평가를 받는다니.
-"No man likes to have his story capped by a better and fresher from a lady’s lips," she wrote. "What woman does not risk being called sarcastic and hateful if she throws the merry dart or engages in a little sharp-shooting. No, no, it’s dangerous—if not fatal." Or as Joan Rivers puts it, "Men find funny women threatening. They ask me, 'Are you going to be funny in bed?'"
"I chose you for exactly who you are, but there's something I think Root had wanted to say to you. You always thought there was something wrong with you because you don't feel things the way other people do. But she always felt that was what made you beautiful. She wanted you to know that if you were a shape, you were a straight line. -An arrow."
아주 곧은, 화살과 같이.
반사회적 인격 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의과대학의 정교한 수련을 완료한 여자는 자신의 병명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반응, 놀람, 경악, 혼란, 대부분의 공포와 아주 약간의 동정 사이에서 여자가 느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감정이란 결국 전두엽과 측두엽이 관여하여 신체 어딘가를 들끓게 하는 전기 신호일 뿐이다. 이제는 명백히 유전적 결함으로 밝혀진 그 질환은 여자가 관여할 수 없는 머나먼 선조와 선조들의 DNA를 통해 내려온 것으로, 여자는 자신의 결핍을 밝히는 것에도 그에 연이은 반응에도 감정이 아닌 자신만의 규범으로 행동하는 스스로에게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은 감정을 삭제하는 대신 감각의 극대화라는 자기 방어를 가져왔다. 부드러운 베어의 등, 마요네즈 없이 할라피뇨가 잔뜩 들어간 차이나 타운의 샌드위치, 오래된 지하실의 묵은 쇠냄새, 경쾌하게 돌아오는 SIG의 방아쇠, 벨벳처럼 미끄러지는 루트의 목소리. 여자가 지닌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기억 또한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다른 이와 함께 한 사진을 기록에 이용하는 이유는 특정 시간대의 감정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기억은 감정이 묻은 이후에야 비로소 누군가의 추억이 된다. 여자에게는 사진도, 그 위에 지문처럼 남은 기억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비로소 여자는 기계에게 말을 건넨다. -루트. 35와트의 LCD 모니터는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루트의 사진을 띄워보낸다. 여자가 아는, 웃고 말하고 협박하고 달콤하게 속삭이던 루트와 다른 듯 닮은, 루트라 명명되고 여자에게 기억된 존재. 여자는 그 사진을 통해 루트의 죽음을 상기한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가? 여자는 기계에게 묻고 싶어진다. 여자에게 사랑이란 욕망과 연계된 열렬한 감각이다. 발 딛는 곳을 잊고, 바라보는 곳을 잊게 하는. 심장이 뛰고 침이 마르며 도파민 분비가 활발해지고 숨이 차며 머리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열이 올라 오로지 상대와의 거리가 사라지길 바라게 되는, 그저 접하고 접촉하며 맞닿아 스스로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기를 열망하는.
감각이란 결국 자신의 본위이다. 여자는 자신의 감각과 자신이 그를 느끼는 방법을 설명한 방식도, 그럴 이유도 찾지 못한다. 온전히 자신의 것만으로 안온했던 세계에 루트가 자았던 감각이 돌아온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자신과 상대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그저 격렬하게 빼앗기고 빼앗는 감각. 오로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언젠가는 흐려질 이 선명한 감각.
그리고 이 감각은 어쩐지 눈자위를 적신다. 거칠게 속눈썹을 훑어내린 여자는 이 생리적 반응이 어디서 도래했는지를 생각했다. 고통, 통증, 혹은 아픔이 주는 반응과 동일하지만 어디에도 이 감각의 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자가 루트를 떠올릴 때면 아픔을, 고통을, 생경한 통증과 더불어 밀려오는 감각이 있었다. 여자는 고민한다. 어쩌면 기계가 여자는 고민을 덜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는 물을 수 있다. 지금 나는 왜 아픈 거지? 기계는 기계답게, 적절한 확률의 대답을 여자에게 던져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여자는 결국 등을 돌린다. 베어와 함께 지하실을 나서며 여자는 그 불가의를, 알 수 없음을, 기억과 연계된 감각의 처음을 간직하기로 한다. 루트, 여자는 물음 대신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그 이름을 되새긴다. 전과 같은 과정으로 여자는 자신의 감각이 고조되는 것을 알아차린다. 땀, 눈물, 일어난 살갗, 난도질하는 듯한 심장의 박동. 여자의 기억과 이어진 감각은 이제 루트라는 이름을 지닌다. 여자는 자신이 고통과 통증, 아픔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어렴풋한 안도를 느꼈다.
가능한 이 기억들이 오래 지속되기를.
이 기억과 이어진 감각들에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여자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