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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겪은, 전쟁을 아는, 여전히 전쟁중인 분들이. 여느 무리가 그렇듯 그중에는 좋은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이상한 식탐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면 반말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면 훈계하고, 식사 후 아무 할 일도 없으면서 새치기 하고, '찬밥도 아래위가 있다'는 장유유서 정신을 강조하는 분들이 정말로 많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어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어이없는 성격이라 하는 평하는 사람들에게 좀 놀람. 배우라면 당연한 정도의 예민함 아닌가? 갈라에 대한 질문도 결국 완곡하게 말하는 선택의 멍청함 밖에 없었고. 별 이상한 배역으로 꼴값 떤다고 동료들에게 살아있는 쥐를 보내거나 살인자를 연기한답시고 진짜 칼 들고 상대를 협박하는 현실의 배우들을 떠올려보라지. 이상한 점을 금세 알아차릴 만큼 눈치 빠르고, 상황의 인과를 파악할 만큼 똑똑하고, 입까지 무거웠잖아. 눈치 없고 골 빈 - 이런 특징으로 관객들을 웃기길 바라는 - 특정 성별의 배우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좋았는데.
어쨌든 자신의 영역 밖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길 바라며 돈과 마음을 후원하는 부조리함.
언젠가 누군가 그랬다. "내가 남자라면 여자 편 안들지. 남자로 사는게 얼마나 편한데, 고추 달고 태어난 거 하나로 지금까지 손해 한 번 본 적 없이 살아왔는데, 이미 모든 영역이 명확하게 나눠진 지금 와서 디폴트가 손해인 여자 편을 왜 들어? 그럼 그만큼 내가 가진 걸 양보해야 하는데, 나 사는 것도 팍팍해 죽겠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지금보다 더 자기 몫을 내주는 일을 하려고 할까?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는데 뭐하러 귀찮은 짓을 하겠어? 이 나라 남자를 가장 많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뭔지 알아? 귀찮음이야. 가만히 있으면 지금까지처럼 귀찮지 않을 수 있는 걸, 괜히 들쑤셔서 귀찮게 만든다는 거지. "
원래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빨대로 음료를 번갈아 마시는 것, 한 병의 물을 나누어 먹는 것, 하나의 음식을 개별화되지 않은 수저로 저마다 떠먹는 것, 하나의 국물 음식을 텀벙텀벙 나눠 먹는 것, 혀를 섞는 키스나 땀이 나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 타인의 체향을 맡는 일 따위가 근래 너무나 싫어진 것은 그런 행위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문화권에 정도 이상 기거했기 때문인지, 그냥 요즘의 내가 접촉이라는 내밀함이 짜증스러울 만큼 민감해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