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8. 7. 17. 10:41

기괴하고 음울하고 슬프고 이상하고 어딘가 아련한, 하지만 끊임없이 제 취향인 영화더군요. 결국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어딘가의 사람, 어딘가의 여성, 어딘가 상처입었지만 그럼에도 일어설 수 있는 이들일테고- 다른 어딘가의 우리들은 그 사실을 영영 모를 겁니다. 


언젠가 모님이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성장, 이라 말해주셨는데. 저는 여전히 내가 될 수 없는 무언가가 생기는 것을 분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지독한 더위는 한편으로 진이 빠지게 시원한 구석도 있어서.


그 흔적이 드문 유년을 지난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머니가 나타나 밥을 차려줬으면 좋겠다거나, 나를 챙겨주길 바란다거나 하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 없지만. 정말 생각이 짧은 이야기를 연속으로 내뱉어 분위기를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 조부가 있었다면, 이라는 상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리광도 일종의 학습의 효과인 셈.  


다른 나라의 언어는 익숙하지 않음에 그저 평평하게 대화하게 된다는 불만이 있음에도, 나는 언젠가 電気釜라는 단어를 몰랐던 내가 쌀이 밥으로 변신하는 기계를 주세요, 라고 말했던 때의 상상 너머 묘사를 더 마음에 들어하기에. 


그 흔한 감상문이라도 내 글로 상을 받아본 기억은 없지만 기자 노릇을 비롯한 이런 저런 상황을 지나며 좋은 글을 보는 눈을 기르게 된 것은 내 행운이라 여기고 있다. 재능도 없는 언어에 늘 욕심을 지니는 이유 또한 이에 기한 바가 크겠지. 혹 다른 나라의 언어일지라도, 그를 배우고 이해하여 더 많은 글을 접하고 읽고 감탄하고 추종하고 싶은 내 열망.


좋은 것을 보면 늘 웃고 싶고, 슬픈 것을 보면 언제까지고 울고 싶은.


최근 어마어마하게 고민하고 있는 턴테이블 + 스피커 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