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9. 3. 5. 17:37

WHAT’S BURR’S HISTORY WITH ROPER? WHY IS SHE SO SET ON BRINGING HIM DOWN?

-Burr knows that Roper is an arms dealer of the filthiest kind and that he’s making a fortune out of people’s death, misery and poverty. She is determined to take this monster down, so she sets out to seduce Pine, knowing with his level of charm, sophistication and intelligence that he’d be able to infiltrate Roper’s inner circle and gain his trust to bring him down from within. She’s a good head-hunter – she does her homework on Pine and knows that he is the man for the job.


단숨에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 복잡한 결로 인해 시선이 멈추는 순간 순간 어느새 응시하게 되는 배우들이 있다. The Night Manager로 처음 알게 된, 그리고 숨이 멎을 것 같았던 그 Broadchurch.


 "아빠, 어떤 일들은 너무 복잡하게 엉망이어서 벌어져요. 아빠가 바꿀 수 없었어요."

 연모도 말했다. 부드러운 손바닥을 진곤의 손에 얹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어린 얼굴로. 그래도 진곤은 연모가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했다. 연모의 손이 계속 굳은 살 없이 부드러웠으면 했다. 사과나 깎으면서, 엉망인 세계를 살아가지 않았으면 했다. 아이인 채로 계속 있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인가. 바람에 춤추는 풍선을 손목에 감고 유원지를 걷듯이 살아가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인가. 분명 어딘가에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능력있는 부모도 있을 텐데. 진곤은 자신이 그런 부모가 아닌 게 속상했다. 멍든 곳, 긁힌 곳, 금이 간 곳, 고름 나는 곳이 속상할 때마다 아파왔다.


내 작년의 발견 중 하나, 정세랑 작가. 세상에 이렇게 미치게 사랑스러운 글을 쓰는 작가가 있었다니. 이런 작가를, 이런 글을 내가 이테 알지 못했다니.


결혼과 재생산에 대한 화제가 던져질 때마다 그냥 저냥 받아들여질 것 같은 이유를 꺼내곤 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생각한다. 전 안될 것 같아요, 마음이 아파서. 부모를 사랑하도록 운명지어진 아이의 유전자 같은,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고통. 정도 이상의 거리를 지녀야만 나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내려다 본다, 는 시선과 감각은 언제나 우리를 신이 된 듯한 착각에 잠기게 합니다.


합리적 결정이라 이름 붙여진 선택과 과정, 그에 얽힌 관계와 정치와 책임과 망설임과 이득과 부수적 피해, 개개인의 윤리와 그럼에도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보편적 공리의 복합함을 그린 영화입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는 실패한 과거를 통해 절반의 가능성을 지닌 현재를 간신히 가늠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현재를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힘이, 개인의 합이 만들어낸 구조의 권력이, 누군가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어쩌면 착각이. 기실 어처구니 없이 막강해져버린 어떠한 도구weapons가 일구어낸 윤리와 힘을 행사한 뒤의 결과 또한 떠넘길 수 있다는 관료주의, 어떤 옮음 혹은 어떤 그릇. 수없이 사라지고 또 탄생하는 각종 주의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서로에 대한 타격체제kill chain와 같은 것들이 수면 아래 일렁이며 관객의 목을 죕니다. 


45%와 65% 사이에서 45%를 윽박지르던 - 하나의 생명에 확률을 적용한다는 우스움 또한 -  Colonel Powell의 그 얼굴이.


언젠가 이야기했듯, 한창 그 일에 매진할 무렵 제 가장 큰 딜레마가 이것이었지요. 사람을 구하기 위한 권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를 죽이기 위한 책임 또한 함께 내려야 한다는 것. 저는 아직도 새벽잠을 깨어 번민할 때가 있습니다. 미성년을 고용했지만 나름의 위생과 휴게공간을 갖추고 명확한 근로시간과 환경을 준수하며 각각의 나이에 맞는 교육 과정을 정비한 공장을 폐쇄하고 중 그 어떠한 것도 갖추지 못한, 그저 이름 뿐인 가정으로 그들을 돌려보낸 것이 옳은 결정이었을까. 


무구한 소녀, 라는 간단한 도구를 이용하고 그 도구에 벌어진 결과에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화면 위 확률로 소녀의 생사를 결정지은 이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각자의 귀로에 오릅니다. 모든 것이 관객이 부여할 수 있는 공감과 감정의 극대화를 위한 장치와 장치들로 이루어진 피상적 영화이지만 저는 이런 영화의 등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인 조종 비행체가 전투 - 혹 전쟁은 아닐지라도 - 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지금, 우리가 보는 화면 너머, 구글 맵이 읊어주는 위도와 경도 어딘가의 지도 위에 살아 숨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바뀌지 않으니까요.


상상은 현실에 늘 미달하곤 합니다. 제가 슬퍼하는 기계를 동정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여기지 않는 이유도 이와 동일합니다. 그 대상이 어떠하든 우리에겐 상상력과 그를 뒷밤침할 수 있는 감정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간신히, 지금 이 현실 속 사람들을 최소한의 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