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9. 4. 21. 14:38

-바닥에 끝이 없는 것처럼 무언가의 지극에도 천장은 없는 것일까. 특이나 처음 보는 순간 마음을 할퀴는 이 아름다움들은.


아무것도 못 하고 있기도, 또한 너무나 많은 것을 하고 있기도 하는 나날.


좋은, 좋아하는 분들을 뵌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훌쩍인데. 다정하게 피부를 감싸던 봄날의 볕이나 그 볕에 몸을 맡기고 가지런히 누워있던 색색의 유리병들, 진짜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샹들리에, 매끈한 표면으로 광각의 세상을 비춰내던 은제 식기, 온 포도를 쓸어담던 출처없는 분홍의 꽃잎들. 말갛게 땋여있던 머리의 정갈함과 연오렌지의 트렌치 코트 아래로 늘어져있던 보랏빛의 랩드레스, 가는 발목을 감싸고 있던 회색 양말과 바늘땀이 촘촘했던 베이지색 로퍼 따위를 떠올리다 생각하게 된다. 그 날의 기억은 내겐 온통 색이었구나. 점점 길어지는 해와 그 각도, 그에 따라 윤을 달리하는 색을 따라 얼마든지 더 걷고,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선명한 기쁨들을.


기쁜 소식과 안타까운 소식, 뭐라 말을 덧붙일 수 없는 소식과 여전한 마음이 침처럼 고여 늘 망설일 뿐인 저이지만. 그래도 들려주심에 감사하며 또한 나아갈 수 있기를, 꼭 공공의 무언가를 거머쥘 수 있는 님들이 되기를, 그럴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말 오래 알았던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길게 이어진 인연만큼 만날 때마다 상냥하게 나를 한꺼풀씩 베어내는 말과, 행동과, 그럼에도 나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던 그 사람 특유의 배려들을. 만난 기쁨과 베여진 아픔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집으로 돌아와 매양 여기까지, 라고 생각했던 시간만큼 내게도 남은 경애가 없질 않아, 이대로 정리하는 것이 맞을까 수십 번 곱씹고 고민하곤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더이상 다정하게 나를 흠집내는 사람과 관계에 내 어느 것 하나 투자하고 싶지 않은 연륜이 되어.


내 마음이 이토록 깊지 않았더라면 그저 얕게 두고 지켜보며 흥미로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저 건강히, 늘 안녕하시길.


원하지 않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시작한 자리였지만 그 끝 또한 역시나 였다는 사실이. 그때 내 나이와 지금 네 나이는 그렇게 차이나지도 않잖아? 라 웃는 얼굴에 그렇지만 지금 나는 나보다 열몇 살 어린 사람이 이성적으로 보이진 않아, 대꾸했지. 대화를 시각화할 수 있다면 아주 깊고 두꺼운 침묵의 벽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겠지. 너는 끝내 계산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고 나는 다시 너를 아는 척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가벼운 해방감을 느꼈어. 그리고 요즘은 무슨 책이 좋아? 라는 아무렇지 않은 문자에 그만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지. 어쩌면 너는 그렇게 변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여전하고.


 독서는 우선 비독서라 할 수 있다. 삶을 온통 독서에 바치는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그 몸짓은 언제나 그것도 동시에 행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역의 몸짓을 가린다. 즉, 그 책 외의 다른 모든 책들, 어떤 다른 세상이었다면, 선택된 그 행복한 책 대신 선택될 수도 있었을 다른 모든 책들을 잡지 않고 덮는 몸짓을 가리는 것이다.


-모님의 언급에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