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올해 들어 매일, 출근 때의 하늘을 찍고 있다. 시간과 바람과 해와 공기와 별과 먼지의 흐름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절대 팔리지 않는 낡은 슈퍼마켓의 빛바랜 음료세트, 천냥마트 등의 간판을 위시한 잡화점이 내어놓은 앙상한 식기건조대 따위. 누구도 사지 않는 지하철의 천원, 이천원짜리 물건과 그 작고 낮은 목소리들, 지하철 출입구에서 시들어가는 채소들의 길을 따라 꾸벅꾸벅 조는 노인들. 얼룩진 앞치마를 입고 가게문을 서성이며 손님을 기다리는 어느 점원, 혹은 절박한 사장님들. 나는 여전히 이런 것들에 가슴이 무너지고.
"이 도시에, 오늘, 지금, 천사가 다녀간들 누가 누구를 알아볼 것인가, 에 대해 생각했다. 이 도시 밤의 마지막 풍경들."
설령 이런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슬퍼하지 말기를.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어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탐험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마흔, 쉰이 되면 너의 외모도 사그라질 것이라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그러면 진짜 내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겠네요, 라는 답변을 남기며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곤 했다.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마음이었는데, 당신의 무언가는 내 외모 뿐이었군요, 하고.
네 구두가 닳는 일이 없게 해줄게, 라는 문장이 낭만적이라 여겼던 때도 있었지. 그 대가로 내가 돌려줘야할 것이 뭔지 몰랐던, 새파랗게 볼이 붉었던 시절.
흰 머리를 처음 발견한 것은 이러다 목을 매달 수도 있겠는데, 생각했던 몇 년전 어느 여름. 연락 가능한 혈연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은 내 시간의 흐름을 더듬어볼 수 없다는 크나큰 맹점으로 작용했다. 언제 머리가 희어지고, 언제 생리가 끝나고, 언제쯤부터 내 몸의 무언가를 보살펴야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없는, 그저 내 앞에 무한대로 펼쳐진 시간과 육체의 망망.
좋아하는 배우들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연기를 하는 꽉 짜여진 좋은 영화였지만 그보다 더 인상깊었던 것은 내 옆자리에서 내내 눈물을 닦으며 스크린을 응시하던 초로의 여성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세상은 이 영화와 얼마나 닮아있고, 제 세상은 이 영화가 기반으로 삼은 Section 214에서 얼마나 변화한 것일까요
그리고 다음에 올 여성들을 위해. "We are not asking you to change the country. That’s already happened without any Court’s permission. We are asking you to protect the right of the country to change."
이 정도까지 폄훼당할 영화는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길게 쓸 수 있는 날을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