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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늦게 이 배우를 다시 알게 되었지만. 저 말고도 수많은 소녀들이 쥬라기 공원에서의 Ellie Sattler를 보며 많은 꿈을 키웠겠지요. 저는 아직도 목이 올라오는 긴 워커와 흰 양말을 신고 성큼성큼 걸어가 공룡의 분변을 살피던 그 모습을 기억합니다. 온전히 옳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일정 이상의 옳음을 전달하던 그 모습을요.
그 발음처럼 흘러간 듯한 유월을 지나, 완연한 칠월.
하나의 집을 꾸미고 계산하는 일은 나 자신을 정립내리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이 색을 좋아하지, 나는 이 재료를 무척 아꼈지, 나는 이 구도가 늘 좋았어, 라 스스로의 호오를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않는다면 그저 남들, 에 휩쓸려버리고 마는. 약간은 열에 들뜬 듯한 이 이상한 기분.
나 자신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발견해내는 일은 항상 즐겁지. 나는 신 음식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신맛이 도는 아이스크림을 즐기지 않고 피넛 버터는 크런치보다는 크리미한 식감을 좋아하는 구나, 하고.
언젠가 좀 어려운 자리에서 음식에 대한 취향을 나누다 그다지 피하는 음식이 없다는 내 대답에 집요하게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던 사람이 있었다. 대화 내내 그 물음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쓰던 나는 결국 푸아그라를 무척 좋아한다는 답변과 함께 그 자리를 마무리지었고, 그 대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나를 괴롭게 만들곤 했다. 나는 푸아그라를 정말 좋아하지만 가볍게 스스럼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닐 뿐더러 아무데서나 내가 원하는 맛을 얻어낼 수 없으며 윤리적으로 옳은 음식도 아니다. 햄버거 하나와 푸아그라가 상대 비교적으로 놓여있을 때 나는 당연히 푸아그라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 나는 그 푸아그라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먼저 고려해본 다음, 대부분의 경우 햄버거를 택하겠지- 라는 생각을 떠올리면 가장, 이라는 최상급이 불러오는 모든 주제의 평평함에 대해 신음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무슨 하루키적인ㄱ-
이 주제를 떠올리면 언제나 함께 연상되는 영화가 있다. 나는 Guardians of the Galaxy 1, 2편 모두를 남아시아의 어느 도상국에서 봤는데, 1편의 경우 Foot Loose를 비롯한 각종 미국적 레퍼런스를 이해할 수 없는 그 나라 관객들은 웃고 떠들며 쟤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어이없음과 의문이 함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영화를 보고 나가던 대부분의 관객들은 정말 이상한 영화라며 욕을 했고,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관람객의 50% 정도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마블 시리즈가 전 세계를 휘몰아친 3년 뒤, 2편이 개봉했을 때 David Hasselhoff를 비롯, "I'm Mary Poppins, Y'all"이라는 대사에서는 누구도 웃지 않았지만 누구도 의문을 표하거나 영화를 비웃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침묵이 깔리는 영화관에서 나는 오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어떤 레퍼런스도 이해할 수 없는 영화임에도 - 그리고 그는 관객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 이 거대한 아메리카나와 전세계를 아우르는 유행에 대한 무지의 표현이 쿨하지 않은 것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내가 어떠한 거대한 시리즈가 지닌 디테일에 대해 더이상 언급하지 않게 된 이유도 이와 동일하다. 문화란 출생 이전부터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 민족과 집단을 형성해온 거대한 기둥들로, 우리가 그 기둥 사이에 서 있는 타문화권의 누군가를 100%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요원하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하나의 문화가 다른 하나에 앞서 우위를 가질 이유도 없다. 그러나 전세계를 아우르는 하나의 문화, 특히나 자본의 거대함을 앞세운 그 흉폭한 유행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하위로, 이해가능한 것들 -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라는 내려봄의 시선이 담긴, 혹은 이해함을 당연한 저변으로 깔고 있는 - 을 당연한 상위로 자리하게 만든다.
내가 이해할 수 있기에 그가 다른 것들보다 우위에 자리한다는 믿음, 혹은 이해하는 내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위에 있다는 착각. 정보는 너무나 많고 우리의 식견은 언제나 좁지. 현대의 식민은 몰아치는 문화적 자본과 그에 따른 이해도에 좌우되고 있는지도,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