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여성이자 희극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겐 이미 정신을 놓아버리는 나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당신 또한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단면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망설임 없어 보이는 그 걸음에 담겨진 무게감이 나날이, 시간이 흐르며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기를 응원하며.
조용히, 가 아닌 큰 소리로 나의 존재를.
"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몇 손가락에 꼽을 만큼 책을 많이 읽었어." 고작 나 정도가.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이제 바깥은 먹색으로 가득했고, 어둠 속에서 흰 거품만이 주기적으로 부서져내렸다. 완벽히 새로운 삶이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나자 나는 완벽한 유배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 들었고, 그러자 알 수 없는 패배감이 가슴속에서 피어났다.
"너 지금 외로워서 그래. 그치만 아이를 낳으면 너도 덜 외로워질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고 아이를 낳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니라면 그것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언니가 이해해주지 못할 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언니 눈에는 나한테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니는 겨울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던 바다. 어떤 맥락에서 시작된 이야기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언니가 옛 애인과 갔었다는 서해 어느 해안가 마을에서의 밤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니는 이제 눈이 쌓인 바닷가 풍경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눈에 덮였던 플라스틱 의자, 눈에 덮였던 포인세티아 화분, 눈에 덮였던 옛 애인의 머리카락. 난방이 충분하지 않아서 몸을 맞대고 잠들어야 했던 민박집 이불의 나프탈렌 냄새, 방안의 한기와 몸의 열기, 하얗게 흩어지던 입김과 바다 위로 끊임없이 하강하던 눈, 하강하던 새, 하강하던 마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언니는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기묘하게도 그 고통이 언니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누구나 생에 한번쯤, 사람 하나를 신으로 여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