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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성이 여성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 형식에 무척이나 약한 편인데. 작중 암시되는 미래의 악역마저 지나치게 오래된 과거의 동료이자 죽음으로부터 수만 번 되살아난 또 하나의 동질자라니. 제가 미치지 않을 도리가;_;
언젠가 그 책을 읽고 모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당황스러울 만큼 그 모든 배경과 인물이 익숙한 거예요. 와, 이거 이렇게 해도 되나? 이거 누군가한테 문제가 되지 않나? 근데 다들 별 말이 없더라구요. 사실 그 책도 동기가 추천해줘서 읽은 거긴 한데-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접점 외엔 아무것도 없는 저한테조차 이렇게 다 잡히는 것들인데. 진짜 이거 이래도 되나? 싶었어요." 모님이 주었던 말 또한 생생히 남아있다. "말을 꺼내도 꺼내지 않아도 본인에겐 손해뿐이니까 결국 침묵하는 거죠. 오히려 말을 꺼내면 잃을 것들이 더 많으니까. 그 작가가 진짜 머리를 잘 쓰네요."
잃을 것들을 불사하고 나선 이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내며. 결국 절필도 퇴사도 어느 것 하나 이루진 것 없다는 사실에 조금.
나 또한 겪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생활을 건드렸을지.
쓰기의 필요와 소비에 대해 고민하는 나날.
어떤 음반들은 내가 원하고 좋아해서 저녁값을 차근차근 모아 산, 어떤 음반들은 좋으니까 한 번 들어봐, 라며 어딘가에서 받았던, 또 다른 음반들은 여차저차 줄을 서거나 이래저래 아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기억들이 차곡차곡하다. 그러나 이 음반은 도저히 구매한 기억도, 영화를 본 기억도 나지 않은데다 3.99달러라는 가격표에 국외 중고상점에서 구매한 듯 짐작하게 된다. 허나 나는 외국에 나가면 CD를 사오는 편은 아닌터라. 이 음반은 어디에서 날아와 이렇듯 내 책장에 자리하게 되었을까.
시대적 특성인 여혐 가득한 가사를 차치하더라도 음반의 완성도가 낮은 편이 아니라 더욱 당황; 추천 트랙은 #6 God's gift to God. by Word.
예전의 개념이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리자, 였다면 최근의 화두는 덜 사고 덜 버리기.
그가 뽑은 '첫번째 집'은 지금은 사라진 행정 구역인 충무시 도남동에 있던 농촌주택이다. 이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부모님과 명현 씨, 두 살 터울 남동생까지 네 식구가 도남동에서 이 집 저 집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몇 달에서 길게는 일 년마다 집을 옮겨다니다 부모님이 처음 장만한 집이다. 명현 씨는 이 집에서 국민학교 3학년이던 1991년 봄부터 중학교 2학년이던 1996년까지 5년 동안 살았다. 엽서를 읽고 집에 관해 이리저리 상상해보는 와중에 엽서 끝부분에 쓰인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보았다. 두 번이나 고맙다고 쓰여 있어 어떤 의미로 고맙다는 걸까 궁금했다. 엽서를 보내줘 고마운 사람은 나인데 말이다.
이사와 리모델링을 거치며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런저런 책들과 앱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유행에 맞춰 - 최근의 유행은 올 화이트와 원목가구, 플렌테리어 인듯 - 깔끔해진 집 사진과 설명을 덧붙이는 이들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선택이든, 어쩔 수 없는 과정이든, 경력이 멈춘 주부라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만족도가 높을 것이라 쉽사리 예상함에도 이런 훌륭한 감각들이 오로지 집안을 매끄럽게 유지함으로 과시되는 것이, 거기다 그 연배의 남자들이 내세우는 인테리어가 대부분 기묘한 과잉에다 아귀가 맞지 않는 컬러임에도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앱의 소개문과 댓글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이.
집을 다녀간 이들의 문의에 문득. 부엌과 화장실의 타일이 깨진데다 모든 마루가 찍혀 썩어가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 귀찮음에 저도 적당히 맞춰 살았을 테고 리모델링은 안했을 텐데요. 필요해서 했고 하지 말라는 건 다 했습니다. 작은 집이니 낮은 가구를 추천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제가 좋아서 높은 침대를 들였고 청소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회색 벽과 더 짙은 타일을 깔고 러그를 입혔습니다. 습기를 머금고 썩어가는게 싫어 모든 문들은 다 떼어냈고 식물은 절대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집은 다 터야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공간이 나눠지길 원해서 중문을 다 달았습니다. 평수가 넓지 않아 붙박이를 하면 전면 거울을 달자 했으나 거울을 좋아하지 않아 무시했고 부엌 상부장도 달지 않는 것이 유행이라 했으나 수납장이 많은 것이 좋아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덕분에 같은 평수 다른 집에 비해 집이 좁아보이는 편이지만 굳이 집이 넓어보일 필요가? 제 돈 들여 제가 사는 곳이니 저의 편의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매일 외치는. 굳이 완벽하리만큼 예쁠 필요는 없습니다. 나와 당신 또한 이런 것도 있구나, 의 일례가 되면 안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