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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이라고 할까, 조금 신경을 써서 보살피는 아이가 있었다. 느리게 진행되는 자가면역질환을 앓았고, 부모는 광범위한 약값과 입원비용을 부담하는 일, 그에 더불어 나빠지기만 하는 아이의 상황을 거의 포기했다고. 그 아이의 어떤 점이 특별히 마음이 들었다거나 다른 과정으로라도 나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병원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지금 내가 받는 월급은 내 생활 주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이지만 이 곳에서는 그 의미가 적지 않았기에. 어쩌면 가벼운 마음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 그냥 때와 시기와 사람이 적당히 맞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
처음 아이를 만나러 간 것은 후원을 한지 세 달째 접어드는 달이었다. 굳이 얼굴을 볼 필요가 있을까, 내내 생각했지만 병원 측의 간곡한 요청과 현지 병원의 상황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잘 꾸며진 병상 위에 단정하게 앉은 아이는 울긋불긋한 얼굴로 내내 나를 보며 웃었다. 내가 하는 어떠한 언어에도 대답하지 않던 아이를 대신해 담당의가 슬쩍 속삭였다.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이곳의 언어로 말을 건네도 아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가볍게 내 손을 쥐었다 놓는, 그 뚜렷한 감촉이 기억에 남았다.
그 뒤 몇번인가 더 방문을 했던가. 이따금은 인형이나 장난감을, 대부분은 가벼운 먹거리를 사들고 가 아이와 나눠 먹거나 함께 자동차를 굴리곤 했다. 여전히 아이는 말이 없었다. 다만 자주 웃었다. 나는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곤란이나 당혹 따위를 어렴풋이 느끼곤 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낯설고 어려운 어른에게 잘 자란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는 아이 특유의 엇갈린 강박 같은 것들. 그리고 어제 병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아이는 더이상 나를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왜, 라는 내 물음에 담당의는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아이가 점점 더 나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슬픔과 기쁨의 반응은 이따금 타인과의 나눔으로 공유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은, 하나의 존재가 느끼는 고통만은 누구와도 함께 공유할 수 없다. 다만 혼자 견뎌야 하는 혼자의 몫으로,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느낄 때 가장 격렬한 고독을 느끼곤 한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내가 될 수 없다는.
나는 네 고통 하나 나누지 못하고, 그저 너를 알고 싶어했지.
내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생각이, 미안함이, 내 자만과 이기심이, 고통 하나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 깊고 얕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