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지켜야 하는 작고 예쁜 것. 나는 남자 중학교를 다녔는데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해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필통에 색깔별 볼펜을 채워 넣고 필기 할 때마다 뭘 쓸지 고민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걸 발견한 친구들이 '여자 같다'고 놀리면서 창밖으로 집어 던진 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그냥 내버려두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때가 자꾸 생각나더라. '그걸 버리지 말걸. 묵묵히 주워올걸.'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을 이 아이들은 지키며 살고 있는 거다. 그게 정말 멋있는 거고."
여자들이 있는 사회니까, 여초니까, 여자들 있는 데가 다 그렇잖아요. 라는 말에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서두를 달며 사람이 아닌 시스템의 부당함에 대한 내 목소리를 키웠다. 내가 공부해야할 몫, 내가 해야 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매 순간 후회없이 일했고 공부했고 이야기했고 눈을 마주쳤다. 그 반향이 어떠하든 변화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옮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각자의 삶으로부터 배워온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약간 달랐을 뿐이니까. 각오한 일이니까 버텨야겠다, 내가 버텨야 내 뒤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말에 남자가 답해왔다. 나는 쉰 쯤에 오로라를 등 뒤에 두고 얼어가고 싶다는 네 죽음을 기억해. 네가 그 말을 할 때 얼마나 간절하고 반짝반짝해 보였는지. 네 죽음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 다만 너는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많이 아팠으니까. 네 남은 시간만큼은 나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네가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쩌면 조금 불행하더라도 나와 함께 불행했으면 좋겠어.
나는 많이 불행했고 언제나 힘이 들었으므로, 약간 더해진 불행과 힘듦이 내 어깨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내가 하지 않았던 내 말들이 무성한 그곳을 나와, 사직서를 쓰고, 우습게도 이 짧은 경력을 기반으로 재취업 자리를 금방도 얻었다. 이전에 비해서는 월급도 복지도 훨씬 적어진, 새로운 직장의 누구도 내 과거에 대해 왜?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는 질문에 무어라 대답을 하고 새로운 유니폼을 받았던 그 오전, 후들거리는 내 무릎이 버틸 수 있을까 자문한 그 점심, 종로 맥도날드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봤던 그 저녁,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비행기표의 날짜를 재취업 전날로 확정한 밤. 이 영화를 봤다.
아이들은 웃고, 울고, 화내고, 또 웃어버리고. 상처를 묻고, 때로는 드러내고, 때로는 감추며. 살고, 살아가고. 많은 것을 그저 베풀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던 선생이 기실 아이들로부터 수도 없는 것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영상화되는 장면에서 봇물처럼 울음이 터졌다. 어쩌면 내 어딘가의 바닥은 누군가의 칭찬을, 격려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남자의 위로가 아닌, 동료로부터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 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안의 무언가가 정말 조금이라도 인정받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쓸데없이 나대며 참을성 없었던' 나로 인해 내 뒤의 기회들은 모두 꺾여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정말이지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어졌다고.
한참 뺨을 닦으며 좌석에 앉아있다 밖으로 나왔다. 꺼두었던 폰을 다시 켜자 알림 몇개가 눈을 아리게 한다. 선생님의 모습을 잊지 않겠다고, 그 앞길에 행운을 빈다고 말해주는 동료가 있었다.
잠시, 그냥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