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21. 5. 11. 12:55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이차 접종을 완료했지만 아직 접종을 하지 못한 친구가 밥값 대신이라며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숙박권을 선물했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중 모든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어느 날 숙박권을 사용하고 키카드를 받아 방에 들어서는 순간 알았다. 아, 집으로 돌아가야겠구나. 이제는 약도 먹지 않은 채 지켜보게 된 병과 수술이 남긴 상흔 중 하나는 지독한 알러지로, 내가 알 수 없는 종류의 화학약품으로 침구를 세탁하는 곳에는 발을 들이는 순간 몸의 모든 림프절이 생동하며 본인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Domesday Book의 등장인물과 로슈 신부의 것처럼 부푼 겨드랑이를 안고 몇번이나 내가 좋아했던 장소와 식당에서 나와 - 방역지침이 강화된 것이 이런 악재로 작용할 줄은 - 찾아간 병원은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한다. 호르몬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심하면 항알러지 약을 먹고, 아니면 좀 지켜봅시다.

 

알콜과 포비돈요오드를 달고 다니는 직업 환경상 매양 부을 수 밖에 없는 눈시울의 림프종은 내 인상을 기묘하게 바꾸어놓았다. 질펀한 전날을 보내거나 직전에 울음을 터트린 사람처럼 붉고 부푼 눈자위를 지닌 내가 십오 분의 체크인, 체크아웃을 끝내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진열된 빅이슈 과월호들이 내 참담을 부채질했다. 젊음과 건강이 아니라면 버틸 수도 없던 가난을 지나- 이제는 정도 이상의 환경이 차려지지 않으면 삶을 유지할 수도 없는, 일정 이상의 사치를 감당해야하는 나이에 이르러.  

 

허나 우습지. 언제나 취미가 우리를 구원한다. 몇 권의 빅이슈를 구매한뒤 들러볼까, 했던 중고서점에서 언제나 전자책이 아닌 실물을 구매하고 싶었던 책을 발견하곤 얼마나 기뻤던지.  

-A tall redhead with narrow features, 닥은 자신의 직업 윤리와 애정을 혼동한 적 없었다. 수면을 일렁이는 잠에 빠진 순간조차 놓지 못한 방아쇠일지라도 까마득한 기억 너머 매끈한 메스가 전해주던 삶과 죽음은 언제나 선명했다. 두세 시간의 쪽잠과 육 년의 시간이 남긴 고색창연한 계명과 기준은 피와 땀이 흐르는 근육이 아닌 뼈에 새겨진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닥이 아는 모든 드라마는 서술 이후의 반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