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한번쯤은 날 봐달라 애걸할 수도 있었지만, 당신이 너무나 지쳐보였기 때문에.
그 부름에 답하지 않은 적 없었으며, 그 신뢰를 배신한 적 없었던 가문의 이름처럼 그저 잠깐의 입술, 잠깐의 성대, 잠깐의 공기였으면 족했을 것을. 그 굳건한 언어 아래 손목이라도 기꺼이 잘랐을 경애를 두고 당신의 눈이 내게 향하는 일은 결코 없었고, 또한 영원히 없었으리라.
배신의 이름으로 새겨질 영원의 미움조차 떠올릴 수 없어 그저 떠나고, 이방을 돌고, 낯선 것들과 싸우고, 칼과 몸을 부딪히고, 온전한 육체로 다시 돌아와 그 주인께 넓힌 땅과 한없이 다져진 마음을 다시금 맹세하고.
실로 타는 목마름으로. 약간 미칠 것 같네요;
그리고 전면에 나선 남자, 남자, 남자들.
운 좋게 닿은 기회가 있어 준비하고 있는 시험이 하나 있는데.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아주 오래된, 좋아하는 연필심이 닳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언제나 공부를 좋아했었지, 하는 감상이 밀려들곤 한다. 늘 비고 또 빈 사람이라 뭔갈 채우는 걸 싫어한 적은 없었어, 그에 관한 테스트는 별개일지라도.
그러다 문득 문득 다리를 접을 때면 발목에 있는 오랜 흉터가 또 눈에 들어와 오토바이로 생계를 때우던 그 시절을 생각하고.
지금도 쓰고 있는 이메일 주소 하단 빼곡한 구인 메일에 고려 중이니 메일 좀 보내지 마라, 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자 돌아온 두 줄짜리 메일에 나조차 마음이 들큰해졌다지. 나는 아직도 너의 Is that so, 라는 억양이 그리워.
평균적으로 많은 월급을 받은 적은 없지만 갖고 싶었던 것을 사지 않은 적도 그다지 없던. 화려한 것보다는 언제나 복잡하고 무거운 것들을 좋아해서 그런 모양이지. 먹는 것에 관심이 없고 늘 친구가 적었던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로 가는 숨줄기 같은 돈이 차곡차곡 모이는 통장 내역을 매일 정리하곤 했다. 긴 안정을 영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오늘 저녁 참치캔 하나 정도는 더 살 수 있겠네, 정도로 어느 저녁을 자족할 수 있던.
-다시 공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