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꽃이 진다.
짐도, 거처를 찾는 것에 소비할 마음도 넉넉치가 않아 몇달 고시원에 기거를 했다. 빛이 없을 수록 잘 자는 성정이라 창이 없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지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 옆방의 소란이며 복도의 소음에 신경이 가는 일도 없었다. 일은 일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내 안의 어딘가가 한 풀 꺾인 듯 무언가 와닿지 않고 늘 먼 기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의문은 여전한 채 그저 가만히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눈꺼풀 위의 감각으로 느끼던, 퇴사 전 나와 마주했던 사람의 마지막 얼굴로 벌떡벌떡 잠을 깨던 나날.
그저 곤란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그 흡뜬 눈들.
아주 좋아하는 분들을 만났고, 좋은 음식을 먹었고, 좋은 곳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통 먼 감각 속에서 입 안을 간지럽히던 부드러운 가리비와 포슬포슬한 연근 튀김, 마냥 물컹하진 않았던 조림과 혀 끝을 알싸하게 휘감던 잔술의 맛이 웃고 떠들던 기억과 한데 엉켜 눈 앞이 아찔해질 때마다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구나. 이 감각과 이 기억의 생생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고.
좋은 마음을, 좋아하는 마음을.
응원이라는 단어 하나가 얼마나 가슴 떨리게 기뻤는지.
모님께 받은 꽃을 보며 차를 우릴 때마다 향긋한 꽃잎 위로 잔잔한 다향이 스미곤 한다. 꽃병이 없어 페트병을 사용한 꽃 사진을 다른 모님께 보내자 기막혀 하던 모님의 답장이 날아왔다. 마침 작업 중인 고택이 있으니 여유가 되면 며칠 사용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 문이나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괜찮, 이라는 단어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이어지는 문장들에 눈이 시린다. 네가 선택한 힘듦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난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힘들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한 게 제일 돈 버는 거라고 생각해. 꽃한테도 빛과 바람은 필요하지 않을까.
꽃에게 필요한 빛과 바람.
고택의 창 하나는 아래위가 긴 직사각형으로, 출근 때는 꽃병의 머리 위를 넘나들던 네모난 볕이 퇴근 무렵에는 꽃병 주위를 어른하게 비추다, 손 끝이 서늘해질 즈음에는 마루를 넘어 일렁이곤 한다. 그 볕에 손을 내밀고 뜨끈뜨끈하게 달궈지는 손등을 한참 뒤집다 미뤄둔 책을 읽는다.
花間一壺酒 꽃나무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獨酌無相親 홀로 따르네 아무도 없이
擧杯邀明月 잔 들고 밝은 달을 맞으니
對影成三人 그림자와 나와 달이 셋 되었네
月旣不解飮 달은 술 마실 줄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나를 따르기만 하네
暫伴月將影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함께 있으니
行樂須及春 봄이 가기 전에 즐겨야 하지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 함께 즐거이 술을 마시고
醉後各分散 취하면 각자 헤어지는 거
永結無情遊 무정한 교유를 길이 맺었으니
相期邈雲漢 다음엔 저 은하에서 우리 만나세
-꽃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