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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보지 않았지만 여전하겠지요. 아름다움이란 그렇잖습니까. 보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내가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언제나 그곳 그 자리에서 온전한.
코르크 마개가 부서진 와인을 따기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원해 합심하는 지인들 곁에 앉았을 때, 아버지가 얹어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 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그 팔 안에서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깨닫고, 배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전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어리석어,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며 살아간다.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그럴' 때, 다만 '그렇다'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이 많아 아름다운 문학을 이따금 상상하며 말이다.
평균보다 발목이 조금 더 들어가고 뒤꿈치가 나온 나는 슬리퍼가 아닌 신발을 신으면 익숙한 것이라도 뒤꿈치가 자주 까지곤 하는데. 생각치 못한 아픔에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다 피투성이 발뒤꿈치를 발견하게 되면 언제나 한숨을 쉬게 된다. 몇십 년이 지나도 넌 굳지 못한채 여전히 연하기만 하여, 내 양말과 신발을 검붉은 빛으로 아찔하게도 물들이고.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법적 성인이 된 이후에 휴대폰을 개통했고 - 당시 법적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은 휴대폰 개통이 불가능했다. 요즘은 어떨지 - 정신이 나간 듯한 극대화한 감각에 둘러싸여있던 기나긴 십 대 시절을 내부의 육체와 근거리의 환경에 묻을 수 있다는 것을 좋은 경험으로 삼고 있다. 그만큼 낯선 사회와 외부의 새로운 인사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내가 사람들에게 즐겁게 선물하는 책은 김은희 작가의 나비가 없는 세상.
먹는 것에 큰 관심이 없고 쇼핑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으며 무언갈 쟁여놓지 않고 연고 없는 독자로 생활하다 보니 어려울 때를 위한 어느 정도의 여유자금은 자연스럽게 유지하는 편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에 말을 더하는 사람들이 힘겨울 때가 있다. 더 큰 집을 샀으면 더 올랐을 것이다, 등지의 의견 같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마음이 모두 기도.
우습고 편견에 찬 이야기 하나. 재래식 화장실이 본채 외부에 있는 오래된 한옥에서 자란 내게 캠핑은 일종의 가난 체험이라 그 일체 - 얼마나 편한 환경을 꾸몄는가에 상관없이 - 를 즐기지 않는다. 외부의 숙박은 언제나 문명에 속한 부류가 좋음.
몇번이나 시도하다 도저히 못 읽고 닫았버렸던 편혜영 작가의 아오이 가든.
소셜미디어에 대해 계속 생각을 정리 중이다. 지나치게 작고 개인적인 것들에 많은 힘이 실리고, 진짜 큰 화제에 대해서는 클릭 한 번으로 시행했다, 라는 마음이 주어지는 것 등. 게다가 소비가 아름답게 전시되는 사회에 살다보니 어떤 소비 이후 인증이 큰 미덕처럼 느껴지곤 하는데, 내가 그런 것처럼 이러한 과한 소비에 부담을 느끼는 이들 또한 많지 않을까. 모든 것이 비싸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그것을 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누가 누구에게 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나 또한 그렇지. 설거지하다 어딘선가 얻은 머그로 어디선가 받은 유리잔을 깬 후 그가 리델인걸 알아차린 후 미묘해진 기분. 알지 못하던 모든 순간순간에 사용하던 자연스러움을 내 솟구친 속물근성이 덮어 누르는 그 누추한 느낌.
모님의 아이를 핑계로 미친듯 팝업북을 사던 중에 박사 논문을 쓰던 남자가 약간 돌은 듯 그림책을 사모았던 것이 떠올랐다. 홀로 고독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아름답고 작은 것들을 보고싶은 그 간절함.
나는 이제 좋은 배우를 보면 글을 쓰고 싶어져.
더이상 새로운 것들을 살 수 없어졌단 이야기를 하다 마음이 맞은 모님과 동묘를 돌며 낡고 오래된 것을 구경했다. 얼마전 뒤가 터져 버린 운동화와 비슷한 사이즈가 있을까 고민하며.
사랑 도살장에서,
그들은 약하건 불구인 놈은 말고 가장 잘생긴 놈만 죽인다
이 죽음에서 달아나지 말아라
사랑으로 인하여 죽임 당하지 않는 자,
죄다
죽은 살코기다
어떤 노래들을 한참 듣다, 왜 이렇게 남자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할까.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양 측을 향한 증오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이상하게 덜 자란 아이들.
근처 도서관의 나는 어린이책도 잡지도 아닌 기이한 책들을 언제나 잔뜩 빌려 빨리도 반납하는, 늘 이상한 시간에 오는 이상한 대여자로 사서 선생님은 언제나 내 정체를 궁금해하고.
따릉이 육개월 정기권을 구매한 뒤 조금 먼가? 싶다가도 자전거 타야지, 라는 생각으로 활동의 반경이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차가 좋았지, 생각을 다시 더듬고 있는 지점.
포스터의 과도한 색상, 이미지, 조악한 폰트가 의도한 듯한 현실과 가상공간이 대비되는 표현이 좋더라.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공간의 구획.
나는 사람을 빨리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떨어진 외로움도 빨리 잊는 편으로. 어느 곳 어디에 있건 고향을 그리워해본적 없다는 말을 하자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진짜 연고가 없잖아. -태어난 곳에 대한 이토록의 미움을 지닌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영화나 드라마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갔을때 내가 가장 많이 틀어놓는 영화는 줄리 앤 줄리아.
자신이 졸업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남자는 학교에 대한 품평을 못 견뎌하고. 이게 특히나 귀엽고 짜증스러워 나는 자주 남자를 놀리곤 한다. 유펜한테 너네 대학평가 밀렸더라? 하면 남자는 화를 참는 얼굴로 뭐라 설명하고, 난 그다지 그 설명을 듣지 않고 근데 말이야- 라 놀림의 말을 덧붙이고. 남자는 다시 희거나 붉게, 조용히 평소답지 않은 어조의 말을 대꾸하고. 나는 다시 놀림의 말을 생각하다 와르르 웃어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