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7. 12. 21. 18:28

그 외모가 신적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_;... 그럼에 왜죠.


오늘부터 시프트가 바뀌어 이번 한 달은 밤 근무만 하는 동시에 휴일이 많아졌다. 마음의 장작을 쌓기 위해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읽고,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좀 나아졌어? 라는 모님의 말에 절망은 충분히 한 것 같아서요. 대꾸하며 하릴없이 웃었다. 아까 들어오시는데 너무 좋았어요. 가을 빛이랑 겨울 바람이랑 내가 좋아하는 공기와 빛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얽혀서- 진짜 섬광 같았어요, 전부 다. 그럼 넌 빛도 없으니 자주 만나야겠네, 라고 아무렇잖게 돌아오는 응답이.


이따금 아이를 본다. 먼저 사탕을 건네자 몇번이고 거절하는 모습에 진짜 안 좋아하는 건가, 사탕을 치우려하자 모님이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다섯 번 거절한 이후에 받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나봐. 한 번만 더 권해줘. 그제야 거절하지 않는 아이의 새순같은 손톱을 매만지다 받아줘서 고마워, 라며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정해놓은 스스로의 경계를 벗어나긴 싫은 거지. 이 나이 특유의 결벽증이랄까,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의 법칙이랄까. 그래도 부모니까, 적어도 내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니까. 스스로 부딪혀서 깨질 때까지는 이렇게 작고 물렁한 세계를 지켜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작고 물렁한 세계. 


자기 비하든 수동적 공격성이든 내부의 어둠을 외부로 표현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라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싶은 이도, 단지 그 행위 자체로 안심할 수 있는 이도 있을 테고. 배려받고 싶지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그를 표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언제 어디서든 직접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차피 사람은 단면적일 수 없고 당연히 이런 모든 방식이 불편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과 표현과 일상과 기록을 읽는 것으로 내 안의 부족함을 간신히 메우는 나 - 또한 다른 이들의 적잖은 불편함을 자아내는 사람으로서; - 로선 왜 굳이 특정의, 그러나 추정 불가의 타인을 깎아내림으로 스스로의 온전함을 과시하는 것인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