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7. 12. 21. 18:30

대학 초년생 시절,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밤샘 작업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 옆으로 당겨 앉은 어느 노인이 팔꿈치로 내 가슴을 찌른 것이다. 나는 평범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잠깐 경계를 늦춰 눈을 감고 있었을 뿐임에도 명백한 추생의 대상이 된 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의 멱살을 잡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소리쳤다. 노인은 당황해했고 무슨 일이냐며 내게 되물었다. 나는 쥔 손을 풀지 않은 채 주변 어느 여자분에게 경찰에 신고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와 그 노인은 해당 역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조사를 받았다. 노인은 무슨 일 때문에 이 아가씨가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오해라는 말을 연신 중얼거렸고 나는 이 사람이 고의적으로 내 가슴을 만졌으며 고소를 원한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했다. 도착한 경찰은 우리 둘 모두의 진술을 듣고 난감해하며 이야기했다. 첫째, 그 지하철 내에는 CCTV가 없어 이 일의 정황을 누구도 알 수 없고 둘째, 일단 아가씨가 이 할아버지의 멱살을 잡은 것은 폭행이며 셋째, 세상에는 이보다 험한 일도 많으니 두 분 다 좋게 이야기하고 끝내시라, 라는 결론이었다. 노인은 기세등등 날뛰었고 나 또한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지만 결국 노인은 훈방되었고 나 또한 별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약 한 달간 나는 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로부터 끊임없는 문자를 받았다.


이 근처 사시네요ㅎ 저도 집 근처인데ㅎㅎㅎ 아 그 학교 다니세요? 저는 어디어디 나왔는데ㅎ 왜 자꾸 수고하라고 하세요 저 그냥 별뜻 없는데ㅠ 저 몇일날 쉬는데 밥이나 한끼 하실래요? 오늘 근처에 순찰 나왔다가 생각이 나서ㅎㅎㅎ 집이세요? 저 안 바빠요ㅎㅎㅎ 동네가 좀 위험하네요 오늘 한 바퀴 돌아드릴까요?


누가 부여한 것이든 일종의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내 신상명세를 알고 있는 자가 자신이 다룬 사건의 피해자였던 내게 이렇듯 사적 연락을 지속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를 만큼 경험이 적고 어리숙한 나이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등지의 우회적인 부정에 불과했다. 결국 집 앞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그 경찰 - 치안이 좋지 않은 동네의 반지하방이었음에 더더욱 - 의 연락을 끊게 만든 것은 내 거절의 대답이 아닌 당시 만나고 있던 애인의 나 이런 거 좀 불편하다, 는 한 마디였다.


그 경찰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내게 주는 호의라 생각했고, 나는 그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 


아주 약간 사적인 영역을 봤다고 하여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 된 양 착각하고 - 수도 없는 화장실 몰카들을 상기해봐도 - ,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집요하게 금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틈을 만드는 것. 어린, 경험이 적은, 보다 가난한, 자신보다 아래인, 혹은 다른 모든 종류의 약점을 찾아 자신이 이용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 여성의 몸에 대한 피해를 일종의 흠으로 받아들이며 보다 우위에 있는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이라는 시혜적 태도를 취하는 것. 자신의 감정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며 이런 내가 좋아해주는, 이라는 표현과 이에 대한 여성의 호오는 그 애정에 당연스레 따라오는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부산물 정도로 취급하는 것.


이토록 비대한 남성의 자아를 만든 것이 가정, 사회, 미디어, 알게 모르게 깔려 있는 문화적 저변이기에. 


언젠가 남성은 자신의 권력과 자신의 좆에 대한 매력을 동일시하기에 패망하기 쉽지만 여성이 지닌 권력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하기엔 사회가 부여하는 검열 - 네가 잘나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 혹은 스스로의 자기 제어가 지나치게 빡빡하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쉽지 않았을 용기를 내신 모든 분들께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