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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당신께 고백하지 않을 어떤 것들.
수행하는 기획이 있어 서울 시내 대부분의 전시를 다녀왔고 퓨리오사, 청춘 18x2, 악마와의 토크쇼, 챌린저스 등을 보고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을 서른 권쯤 읽었지만 그리 싫지도 좋지도 기억에 남는 것들도 없는 걸 보면 모두들 고만고만했던 모양.
배우가 아름다웠고 보석이 황홀했고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낸 형체가 굉장하네, 라는 감상만.

-다만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지.
네가 없는 이 안전하고 평온한 공간에서
나는 감히 그 공기와 너를 상상하고
딱히 누군가를 따라 무언갈 산 적도 그럴 자본도 시간도 충분치 않아 출처를 밝힘이니 라방이니 손민수니 하는 이야기가 그저 새롭고 신기하고.
아, 책은 자주 찾아 읽었지.
나는 내 무식에 대한 공포가 정말 커서.
내 짐승같은 특기 중 하나. 지면의 경도가 달라짐으로 인한 흙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을 수 있어 오늘 강우 확률을 7할 정도로 맞출 수 있음. 십여 년까지는 9할 이었으나 기후변화로 인해 대기보다는 구름이 비를 내리게 하는 경우가 많아져. 갑작스럽게.
또 다른 특기는 이륜차를 기술이 아닌 힘으로 끌고 다니는 것.
혀에 링을 박았을 때 다른 건 차치하고 끼어들기 한 차를 위협하며 가운데 손가락과 혀를 함께 보였을 때 효과가 좋았던 것이 새삼. 그 땐 어린 객기에 열에 아홉은 헬멧도 안 썼지; 모님이 지금 사지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것이 놀랍다 할 정도로.
춘천은 다녀올 때마다 재미있는 경험을 하는 곳으로 - 인턴 경험으로 짧은 체류 시 러시아도 다녀오고 어느 이하 영하의 대기 속에서는 물을 뿌리자마자 언다, 는 기본 열역학조차 통하지 않는 기억 또한 - 오랜 지인을 만나러가는 길. 김유정역에서부터 전철내를 오가던 어느 중년은 닭갈비 가게를 선전하며 무료 투어까지 있다는 점을 강조해가며 팜플렛을 줬지만 혼자 앉은 나만은 외면했고, 헤매어가며 탄 버스에서는 초등학생에게서 차비를 받은 버스 운전사 분이 주행 내내 초등학생이 돈을 지불해야하는 이 나라의 현실을 개탄했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게 된 최근, 대신 선택한 숯불 닭갈비와 막국수가 정말 놀랄만큼 맛있었고 머리 많이 길었네, 라는 인사에 그러게 잘라야하는데. 대꾸 한 마디에 끌려간 미용실의 삼만 원을 지불한 컷과 펌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드물게 여러 번 거울을 보며 웃었다.
버터크림을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함께 걸어간 오래된 빵집의 버터크림빵도 가방 곁으로 삐쳐나올 만큼 거대한 맘모스빵도, 굳이 시간을 내어준 그 지인의 마음도. 함께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걷는 공지천의 푸른 수목도 국립춘천박물관의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도 입천장이 마를 만큼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언젠가 네가 서울에 온다면의 가정을 이야기하고 싶어졌지. 내가 자주 자전거를 타는 산책로엔 붉은 양귀비가 한창이라고. 너만 허락한다면, 네가 고개만 끄덕여준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긴 산책을 하고 싶다고.
짧게 온 비를 맞다 다시 오래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눈이 아파질만큼 진초록의 나무와 모든 것을 반짝이게 만드는 치열한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부질없고 아마도 부질없으며 그럼에도 부질없으나. 이를 지키기 위해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