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24. 10. 1. 16:38

너를 사랑하고 싶어 자주 무릎을 꿇었고.

나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과 소속감없음에 대한 불안은 심하지만 스스로를 동정하는 타입은 또 아니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이나 피로를 쏟는 걸 귀찮아하는 회피+성급한 결정형으로 혼자 오래 고민하고 정리하자 싶으면 빨리 결정하는 편이었으나 나이가 들고서는 결론짓지 않는 것들이 많아짐. 모든 것들을 그저 내버려둔채 지켜보고. 다만 한 가지, 혈연이나 관계로 연관지어지지 않은 타인들의 걱정과 마음을 위해 내 삶을 부수지는 말아야겠다, 여겼던 것이 어쨌든 삶의 이정이 되었다. 장학금이 필요했지만 최대한 높은 학교에 지원했고 가장 큰 회사에 원서를 넣었고 되든 안되든 여러 시험을 치렀고.

그와 더불어 십 대 초중반에 내가 이룰 수 있는 모든 영화와 호사를 누려봤기에 최고를 아는 것이 비교우위적으로 힘이 되었다, 우습게도.

저자가 무심코 배제해 의미심장한 시행이 상당히 생략된 그의 시(자전적인 작품으로 보기엔 너무나 알수 없고 말을 아끼고 있다) 같은 작품이 갖는 인간적인 사실성은 저자의 주변 환경, 성향 등의 사실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오직 나의 주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언에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

-창작의 조물주가 사라진 뒤 권력을 쥐는 것은 바로 읽은 자와 이후 발언하는 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