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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인물들을 빌어 Columbus라는 공간을 환희하는 것으로 쉽게 착각되어짐에도, 기실 Columbus를 통해 인물들을 이야기하는 것에 더 많은 힘을 두고 있습니다. 선명한 소실점과 수직과 수평의 선들이 가득한 건물과 거리를 거닐며 인물들은 때로는 지나치게 작게, 혹은 좁게- 때로는 소리없는 세계의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우리는 이 작은 정보들 틈에서도 N을 지닌 Jin이 왜 Columbus를 찾아왔는지, Casey라 불리우는 Cassandra가 왜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회상 장면도 불러오지 않고, 굳이 소리에 많은 입체감을 불어넣지 않으며, 카메라의 동선마저 제한한 듯한 - 두 주인공이 산책로를 걸을 때 무릎에서 잘리는 그 애매한 앵글감하며 - 차분하고 정적인 영화의 흐름과는 달리, 대디 이슈에 시달리며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와 재활 중인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못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꿈을 간직한 여자의 내면은 자신들만의 것으로 격렬하고, 또 위태롭습니다.
그럼에 이 두 사람은 아름다운 건축과 풍요로운 환경을 이야기하며 조금씩 서로를 털어놓게 되고, 설명하지 않는 것을 굳이 알려 하지 않으며 - 여자는 어머니의 문제를 묻는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남자는 아버지의 상태를 묻는 여자의 의문에 답하지 않는 - 오로지 현재만을 비춰주던 Columbus에서 각자의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자신이 왜 이 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던 남자는 종국에는 그 곳에 남기로 하며, 끝까지 이 곳에 남으려 결심했던 여자는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건축, 그리고 자신만의 꿈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영화 상에서 변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Columbus라는 공간과 건축과 아름다움은 여전하고, 아버지의 문제는 아버지의 문제로, 어머니의 문제는 어머니의 문제로 그대로 남겨집니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이에서 비롯됩니다. 어떠한 드라마틱이나 격정적 충돌 없이, 다만 이 섬세한 연출과 간접적 훑음으로 변화됨을 암시하는.
여전한 공간의 충실함과 내면의 변화가 하나가 되어, 아름답게도 유지되는.
공간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Lost in Translation과 Lady Bird가 함께 생각나기도 했는데. 전자가 문화적 상대성에 대한 비웃음과 성적인 긴장감이라는 면에서 저를 실망시켰고, 후자가 위악이라는 면면에서 저를 약간 허탈하게 만들었다면 있는 그대로의 변화와 공간, 꿈과 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한 이 영화에 저는 온 몸으로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올해의 영화입니다.
"브로냐 언니. 나는 멍청했고, 지금도 멍청하고, 앞으로도 계속 멍청할 거야. 아니면 지금의 생활에 젖어버린 것인지도. 나는 과거에도 운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운이 없을 거야. 나는 파리가 마치 구원의 장소인 것마냥 생각했지만, 파리에 가겠다는 희망은 오래 전에 사라졌어. 이제 그 가능성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버지께 이 말을 하는 것도 두려워. 물론 내년에 파리로 가서 언니와 같이 지내겠다고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기뻐하실 테고 또 분명히 격려해주시겠지. 하지만 나는 나이 드신 아버지께 자그마한 행복이라도 선사해드리고 싶어. 한편으로는 내가 지닌 재능을 묻어버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내 재능도 어딘가에 쓸 만한 것일 텐데."
-문득 퀴리 평전의 아직 어린 마냐가 브로냐에 보낸 이 서신이 떠오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