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8. 5. 24. 11:17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혼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해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모임의 나는 내가 선택한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내 해석이 가미된 영어로, 일본어로, 그리고 다시 원문의 한글로 읽는다. 모임에 놓여진 각종 국적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언어로 된 문장의 의미만을 받아들인다. 영어를 아는 이들은 선명한 묘사의 인상적임을, 일본어에 익숙한 이들은 단어의 리듬과 운율과 마치 시처럼 아름답게 갈무리되는 문장들을, 한글을 아는 오로지 나는 내가 아는 도시와 이미 먼 서울과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린다. 구름을 더듬는 듯한 묘사가 주는 그 기묘한 허망함,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재정립되는 글의 이미지를. 


언어의 힘은 기실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아는 사람이 그 힘을 해석한다.


원래도 좋았지만 근간 너무 좋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