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8. 5. 29. 00:42
 롤랑 바르트는 '작가'와 '글쟁이'를 구별했다. '작가'란 제도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채 언어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소유해온 자다. 작가가 세상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면, '글쟁이'의 글쓰기는 목적 지향적 행위이다. 그들에게 쓰는 일이란 곧 상황에 개입하는 행위이며,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성을 보존하고 자발성을 지켜내는 일이 된다.

모님의 새 글을 보며 생각했다. 언어에 대한 독점적 권리, 라는 표현을 이런 때에 쓰는구나. 하고. 내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곳에 당연히 놓여있는 단어, 문장, 완결된 단문. 언젠가 나는 우리는 인과 없는 당연함이 곧 신의 존재 증명으로 연결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우리에겐 논리와 과학으로 이 인과를 밝혀 신을 끌어내릴 권리가 주어진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인과와 내용과 역사와 인물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당연하게, 하지만 내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체계적으로 아름답게 조율된 것을 보면 나는 어딘가 절대적인 것은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내 부족함과 다른 이의 충만으로 만들어진. 그저 압도되는. 

-고통과 응시에 관한.


그 해 겨울 나도 남들처럼 병아리를 샀지. 중닭보다 조금 더 높은 음으로 우는, 흰 자 없이 그저 검은 동자만 깨끗하게 번들거리던 노랗고 작은 병아리. 나는 송아지가 소로, 강아지가 개로, 오리새끼가 집을 지키는 큰 오리로 자라나는 집에서 성장했기에 그 생명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 쉴 틈 없이 울던 너는 내가 읽던 명작 문고의 책등에 기대 어느새 꾸벅거리며 잘도 졸았지. 나는 간장 종지에 물을 담아 밀어주며 잠에 잠긴 너의 부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어. 보드라운 너의 솜털과 말랑한 속살과는 전혀 다른, 어른만큼 단단하게 너를 지키고 있는 그 굳건한 감각기관을. 잘 먹어야지, 다 자란 사람처럼 어린 너를 어르며 나는 어쩐지 들떠있었지. 내가 책임져야 할 생명, 내가 몫을 지불한 어느 생물, 온전히 내 손 안에 맡겨진 삶. 


다음날 너는 뻣뻣하고 차가운 시체가 되어 내 낱장에 짙은 얼룩을 남겼지. 나는 네가 아직 어린 새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네게 많은 열과 빛과 영양과 좀 더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 못했어. 싯누런 종이박스에서 열심히 삐약거리던 병아리는 대부분 폐사 직전의 수평아리들이라는 사실도. 사라진 생명에겐 애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때였지. 그저 내 몫의 책임을 잃은 것에 망연해진 내 얼굴과 너의 죽음을 번갈아보던 조부가 말했어. 묻지 마라, 마음은 묻는 게 아니다.  


나는 아직도 조부가 너의 죽음을 쓰레기 봉투 속에 밀어넣던 것을 기억해. 너를 내 손으로 땅에 묻었다면, 나름의 형식을 갖춰 자그마한 십자라도 새겨주었더라면, 네 죽음에 내 감정을 쏟아낼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는 여전히 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다만 너의 죽음과 그 형식이 서러웠기 때문에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때로 죽음은 책임을 동반하지. 어쩌면 삶보다 더한 의미로. 내 작은 병아리, 나는 너에 대한 마음을 묻지 못했다는 이유로 너를 기억해. 이 마음은 영원히 너에 대한 미안함을, 죄책감을, 그리고 너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겠지. 사라지고 지워질 기회를 잊은 채의 이 영원히 날카로운 마음은.   

 

이제 곧 다시 병원으로, 라는 생각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환희하게 만들기도.

 

교육은 가까운 이들의 행동을 거듭 보고 반복적으로 언어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그를 모사하게 되고, 그 모사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동시에 그 빈도가 잦아지며, 결국에는 그를 스스로의 습관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타인에게서 내게 없는 교육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일. 물은 컵에 따라마시고, 깎은 과일은 꼭 접시에 담아 포크로 먹고, 타파 웨어를 통째로 식탁 위에 올리지 않고, 캔의 내용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요리하는 남자를 보는 일들. 


나 자신이 삽시간에 허름해지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드는 타인의 습관. 그 일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