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vc 2019. 2. 13. 12:21

-이 시리즈와 이 세 사람의 팬인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많은 이들의 추억과 애정과 감정과 역사가 담긴 창작물을 볼 때면 내 시간의 몇 웅큼도 이 안에 적잖이 섞여 있겠지, 떠올리곤 한다. 일개, 혹은 일부라 칭해지는 몇몇의 손과 머리를 벗어난 수많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깊고 질긴 파문. 원한 적 없지만 미적거리며 그 주변부를 머무른 이들조차 휩쓸리고 마는 그 격렬한 흐름.


전쟁이 없는 세대의 사건이란 이렇듯 거대한 창작이구나, 하고. 


책 배달이며 희망도서 신청이며 오가다 자주 방문한 동네 도서관에서 작년의 다독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며 상품을 받으러 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일주일에 세 권쯤, 한달에 열다섯 권, 일 년에 백팔십여 권, 주말이며 연휴가 겹칠 때 조금 더 읽었다고 생각하면 이백여 권, 이 동네에 자리를 잡은지는 이 년 남짓. 겨우 사백 권의 독서가 어느 벽면에 내 이름이 새겨질 만큼의 위대한 일이었던가, 하고. 


서핑을 하다 어떤 글 하나를 읽었고, 오래 전 내가 쓰다 갖은 표절과 귀찮음으로 닫아버린 어느 블로그의 삼만 자짜리 중편 하나와 전개와 표현이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득 떠올랐다. 왜 예전의 나는 그 일이 있었을 때 출간된 모든 책을 회수해서 폐기하고 그 사람과 내가 아는 문구들을 인정하고 표절을 공개적으로 사과하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 앎이, 애정이, 걱정하는 마음이, 우리가 같은 화제를 이야기하며 보냈던 많은 시간의 기쁨이 결국은 내 다문 입의 고난이 되어 심장에 박힌 칼날로 존재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영향을 받았다, 는 애매모호한 문장 안에 그 사람과 나의 복잡함이 녹아 사라질 것이라 믿었을까.


좋아함을 배신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다, 는 사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던 내가. 


모든 감정은 시간에 희석되고 남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대하는 나의 원류, 그리고 본질이다. 이제 나는 더러워서 피하기보다는 뒤집어 쓰더라도 끝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 내 말과 문장을 뺏지 말라는 댓글을 남긴다. 두고 사라지는 위대함보다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입을 여는 찌질함이 되기 위해.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 冷たい人と言われたから

愛されたいと泣いているのは 人の温もりを知ってしまったから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 あなたが綺麗に笑うから

死ぬことばかり考えてしまうのは

きっと生きる事に真面目すぎるから


내가 죽으려 생각한 것은 차가운 사람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

사랑받고 싶다며 울고 있는 것은 사람의 따스함을 알아버렸기 때문


내가 죽으려 생각한 것은 당신이 아름답게 웃기 때문

죽는 것만 생각하고 마는 것은

분명 살아가는 것에 너무나 성실하기 때문에


-일본의 노래 가사는 언제나 지나치게 극단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볕의 따스함에 陽だまり라는 단어를 붙이는 표현력이 종종 나를.


-수키 킴의 자매가 써니 킴이었구나. 북시립미술관에서 본 적 있던, 시대착오적인 교복의 색감에 대체 언제 도미했기에? 라는 물음으로 연혁을 넘겨본 기억의.


지금은 귀찮음에 내 랩탑 포맷도 제대로 안 하고 있지만; 당시 아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내, 외부 모두 커스터마이즈했던 어느 컴퓨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