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끔 떠올리면 숨도 못 쉴 만큼 좋아하는 영화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Foxcatcher, 라 말을 꺼내자 남자가 엄청나게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 왜? -아니. 근데 왜? 음, 아니. 그래서 왜? 아 그냥, 아재 - 이 단어에 대한 남자의 발음은 이제 위화감이 없다 -  취향이라고 생각했어. 젊음을 동경하는 늙음과 늙음을 경애하는 젊음이 동시에 등장하고, 모든 걸 가진 중년은 살해당하잖아. 타인의 충족을 못 견뎌하는 결핍의 영화라고 생각했거든.


 -아.


여행은 혼자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나는 오성급 호텔이 아니라면 아예 게스트 하우스를 숙소로 잡곤 한다. 애매한 별들의 호텔 주인과 일하는 사람들, 혹은 그 주변의 인물들이 혼자인 내 방문을 따고 들어올 가능성은 낮은 편이 좋으니까. 평균보다 크고 평균보다 무거운 나조차 이런 일들을 수도 없이 겪는데.


누군가 나로 인해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높은 굽을 신은 채 너를 향해 웃을 거야,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고.


처음에는 선의였지. 몇줄의 글귀를 그 나라의 언어로 바꾸어놓는 일은 내게도 어렴풋한 공부가 되었고, 그렇게 애를 쓰지도 공을 들이지 않아도 네게 뿌듯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 또한 들떠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의 부탁은 점점 살이 붙어, 이제는 A4 몇장이 팔랑거리는 내용을 두고 나는 더는 안 된다는 거부를 했지. 내가 지금의 자리를 잡은 것처럼 나도 나와 같은 이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길 원한다고. 이건 반칙이고 이제 손등의 혈관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나는 더이상 누군가의 울타리를 침범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너는 식은 눈으로 나를 보다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 혼잣말을 흐렸지.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지. 지금도 난 그렇다고 생각해. 너는 답하지 않았어. 너의 침묵에서 나는 네가 생각하는 나라는 친구의 범위를 읽어냈지.


은은하고 맵싸하게, 모든 현실을 송두리째 아우르는 감각.


그 마음의 계량. 


의학은 우리 시대 유일하게 남은 예언학이 아닐까. 유전과 세포를 기반으로 하는, 언젠가는 닥치고 말 선고의 학문.


사기에 가까웠던 그 계약을 뒤엎기 위해 대리점을 찾아가겠다는 나를 향해 언젠가 모님이 그랬다. 네가 화를 내는 것도, 이런 일에 시간과 돈을 쓰는 것도 나는 아까워. 그걸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냐. 그냥 내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어. 그냥 네가 알고 이런 나를 이해해주면, 나는 그걸로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 뒤부터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를 판단하기 전, 지금의 이 감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에 공정과 정의감에 취한 나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반응을 구한 내 눈 앞의 사람을 위한 것인지. 


알고 방문한 것은 아닌데. 무난한 근현대 미술 - 작품 사이 간격이 넓어 휠체어 이동도 자유롭고 - 을 보고자 했던 내 바람과는 달리 오더 메이드 납품 이후 본사가 재구입, 경로로 이어지는 Van Cleef & Arpels의 예술에 가까운 공예품만 실컷 감상했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공간이 적어 걱정을 좀 했는데, 사전 문의 없는 방문이었음에도 내가 이동하는 내내 사람이 붙어 안내와 간격을 동시에 유지하게 해준 것도 꽤 인상적이었고.


일종의 궤를 벗어난 실용품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는 구나, 생각을.


이 분야는 일천하여 경도와 강도의 구별, 브랜드별 컷팅의 특징 정도가 들어 익힌 인지의 전부였는데, 세공 - 소위 미스테리 컷팅이라 불리우는 -의 방법이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연신 감탄을.


Tiffany는 Tiffany 세팅과 밀그레인 기법이 유명하지만 일단은 전가의 보도인 난초 시리즈를. 2007, 8년 즈음에 한국에서 전시회도 열렸던 것으로.


언젠가 다른 모님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London Blitz이라던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떠올리면 심장을 대패로 밀어내는 것처럼 소름 끼치게 좋다고 이야기주신 것처럼, 저는 다이나모 작전 중에 됭케르크의 작은 배들Little Ships of Dunkirk의 선수를 장식했을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를 생각할 때면 호흡 곤란으로 시야가 녹아내릴 것 같습니다.


-스카치의 이데아처럼 생긴 저 청년은 뭐지? 라는 감상이 10월 개봉을 기다리지 못해 비행기표를 검색하는 수순으로 이어지는 이 뻔한 과정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