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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누군가의 추천에 또 어이없을 만큼 빠져있는 중.

어떻게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십분이라도 본다. 그리고 장면장면을 복기하며 조용히 되내인다. 각자 다른 넷의 삶이 그렇듯 나 또한 안되면 말고, 내게는 그래도 선택지가 있다.

붉은 흙속에 손을 묻고 마치 무덤같다는 생각을 떠올렸지. 서늘한 습기와 두텁지만 기분나쁘지 않은 무게감 속에 하릴없이 손가락을 움찔거렸던 때.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누군가를 상상하던 나를 근간 자주 떠올리는 것은 이제 내가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보다 높은 학위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스칠 때마다 굳이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하나 눌러 앉힌다. 대가를 장담할수 없는 긴 공부에 시간에 투자할만한 여유가 없었네요, 라고.

440.

-요즘 너무나 빠져있는. 담담한 이야기에 묻은 한숨들이 견딜 수 없이 좋음.

나는 요리드라마나 요리책을 좋아하는 편으로, 창작자가 상상가능한 후각과 미각을 시각과 청각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을 재미있어 하는데. 이는 요리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라 요리책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가 요리 과정을 좋아하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면 곤란할 때가 있다. 맛있는 것, 예쁜 것, 아름다운 것, 정성과 마음이 들어간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기보다는 타인의 말끔한 결과물을 즐기고 싶은 게으르고 가벼운 성격이네요.

439.

맞는 부분도 덜 맞는 부분도 있다고 느꼈으나 그 어림과 젊음에서 오는 에너지가 흥미로워서.

냉장고 아래로 떨어져버린 유니버셜 스튜디오 싱가폴의 마그넷과 책장 뒤로 넘어간 다우니 섬유유연제가 약간은 신경쓰이는 계절.

뭔가 적극적으로 자라는 것이 보고싶다는 내 말에 몬스테라 한 줄기를 꺾어보낸 남자의 국제소포는 당연히 세관에서 제지당했으며; 수순대로 폐기되었다. 가끔, 정말 가끔 머리 좋음과 일상적 수준의 상식 사이를 가늠해볼 때가 있고.

어쩌다보니 과학철학을, 특히나 칼 포퍼를 많이 들여다보고 있는 여름.

438.

잘 되길, 생각한다. 빌어줄 말을 더 떠올리지 못해 그저 잘 되길.

손목시계 아래 선득한 땀이 고이는 계절.

문득, 오랜 기억이 지층 아래에서 떠올라 불현듯 다가올 때가 있다. 아버지의 시신을 본 내가 죽음으로 그를 기억하고, 조부의 마지막을 보지못한 내가 영원한 삶으로 그를 떠올리듯. 언젠가 내가 조부에게 물었다. 내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조부는 내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누구도 내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듯한- 지난 과거를 떠올릴때면 짓곤 하는 특유의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고, 역시나 그답게 직답을 피했다. 서너일 후, 내 잠자리를 정리해주던 조부가 평온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예쁜 사람이었다, 라고. 아무런 부연도 없는 단정적 어조에 나도 다른 것을 묻지 않았고, 한동안은 거리를 지나는 내 눈에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곤 했다. -예쁜 사람, 예쁜 사람.

내 미감은 조부와 책과 교육과 남자와 또래들에 의해 만들어져, 어떤 것들은 아주 유치하고 말도 안되게 장난스러우면서도 다른 어떤 것들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 콧대가 높아서. 이따금 나는 다른 이들의 미학을 험담하는 이들에 대한 이해가 힘들다. 누구에게나 같은 환경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손 닿는 것을 택하는 이들을 폄하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지.

나는 아직도 세계는 커녕 자신의 마을 바깥으로 발조차 내밀지 못하는 이들을 너무도 안다.

언제나 세계는 멋대로 참혹하고 멋대로 매혹적이라, 우리는 이토록의 공포과 경외를 안고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우린 창조력도, 혁명도 없다. 그러나 장난은 친다. 장난이 일상의 혁명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절은 계절같은 것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없다. 왜냐면 법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류이치 사카모토다.


437.

버티는 것도 지겨워 무작정 자리를 떠 평일 저녁 전시를 보러갔다 종료 며칠 전+무료 입장이라는 사실에 전시보다 사람이 더 많은 공간을 경험했고. 연착된 지하철로 순환 없이 매캐하리만큼 더운 승강장에서 싸움을 벌이는 이들을 구경하려 더 몰리는 양상을 보며 사람들은 타인의 재난에 관심이 많구나, 생각했다.

오래 전 맞춰두고 안 입는 한복을 나눔하겠다는 분이 있어 생각없이 신청했다 화사한 두루마기에 속치마까지 넘치는 한 상자를 받아 가을의 한복과 고궁 나들이를 떠올렸고. 겨울용 정장 블라우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중 또 나눔이 있어 보낸 메세지에 여름 옷에 푸딩, 간식, 음료수까지 또 잔뜩 챙겨받은 종이봉투를 들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커피 한잔을 사드리고 따릉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든 정말, 사람으로 살고, 사람으로 죽는다.

그 사이 장물전;도 관람했고. 굳이 움직이기 애매한 거리와 홍보 부족 탓이라 생각했지만 사람이 너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흥미로운 전시라 여겼기에.

좋다고 생각한 것은 죄다 컬렉션의 일부였기에 어쩌면 이렇게, 하는 한숨을.

가지지 못한 욕망이 폭발하던 시기는 이제 내게도 사그라들어, 가능하면 있는 것을 적당히 고치고 꿰매고 맞춰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만 그 과정이 새것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요구하면 좀 곤란해지고.

최근 산 것 중 가장 잘 쓰고 있는 것은 코코넛 오일. 여름이라 녹일 필요도 없어 머리카락이며 온 몸에 바르고 있는.

굳이라면 차라리 조금 더 걷고 심야버스를 타기에. 택시를 탄지 얼마나 되었나, 이따금은.

이 모든 절약은 미친듯 틀고 있는 에어컨과의 등가교환으로;_;

운동을 한 과거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데 -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회자되는 내 전학교는 정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고 - . 군살이 늘고 있지만 어쨌든 잘 소화하고 적당히 자고 곳곳에 자리한 근육 덕분으로 아직도 몇킬로 쯤은 너끈히 뛸수 있는걸 생각하면 어쩌면 십 대에는 운동을 하는 것이 긴 생에 가장 효과적인 투자가 아닌가 더듬어 보는 때가 있다.

436.

-아름다운 걸 보면 영원히 웃고, 슬픈 것을 보면 오래 울고 싶다. 내가 무뎌지는 것이 가장 두려워지는 연배.

어느 나라를 처음으로 다녀왔고. 긴 출장에 모두가 간다는 관광지가 아닌 연구소와 기관, 정부 부처를 옮겨다니는 일정에 한국과 무엇이 다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다만 현지 코디네이터가 이야기해준, 초원 위로 쏟아져내리는 별빛을 당신이 겪을 기회가 있길 바란다는 그 애틋한 문장을 가만히 새겼고.

개성없이 무난한 인상으로 어디를 가든 그 나라 사람처럼 생겼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기에. 역시나 이 나라 북쪽 사람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칭찬 고맙다, 는 내 대꾸에 돌아오는 웃음들이 좋았다. 향취가 독하다는 고기며 만두도 나는 거리낌없이 먹고 잘 소화했고.

누구도 원하지 않기에 내게까지 온 자리를 오래 거절했다. 결국 퇴사를 거론하는 내 언어에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급이 있으며 우리와 같은 급들은 맞는 미래를 잘 가꾸어야한다, 힘찬 대답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졸업한 학교들의 몇몇 면을 제외하면 저는 주보호자가 없는 고등학교 중퇴자로 어쩌다 노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져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 모든 과거를 한 단어로 급, 이라 표현할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맞춰보자는 이야기에 그 자리에 앉을 다짐을 하긴 했지만 내 실망도 낮아진 기대치도 여전하고.

언젠가 이야기했었지. 나를 사랑하기로 운명지어진 마음을 감당할수 없어, 내 인생에는 아이가 없을 것이라고. 한편으로 지금 누군가 나타나더라도 적절히 거리를 유지할수 있는 고요를 키우는데 걸린 시간을 생각해보면.

덥고, 지치는 일들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그마한 재미라도 얻으실수 있길 바라며. 모쪼록 건필, 여름감기, 이사 모두 무탈히 잘 해결되시길 바랄게요.

435.

이래저래 많이 버리고 기부하고 드물게 이것저것 산 달이기도 했던 오월. 이따금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오래 달아두었던 액자가 떨어지며 벽지가 길게 찢어져, 가릴 생각을 하다 운좋게 당근에 올라온 빈티지 아이템을 구입. 조명보다는 벽걸이로 쓰고 있다, 이케아.

친구의 조각품을 잠시 다룰 기회가 생겨 담아 움직일 수 있는 웃기는 가방을 하나쯤 사고싶다고 생각한 차에 역시나 당근으로. 추후 내가 알만큼 꽤 이름있는 디자이너의 콜라보 제품인걸 알고 놀람. 그리고 생각보다 컸다;

도쿄에 하루 머물때 살까 생각했던 책인데 마침 다른 책을 주문할 기회가 생겨 함께. 존 레논이 본 일본, 이라는 제목처럼 간단한 그림과 영어-일본어 단어장스러운 구성이 재밌어서. 직접 그렸다는 삽화가 꽤 조야함.

잠깐 이야기한 기억에 일본을 다녀온 모님이 사다 주신. 페트병을 오래 보냉할수 있는 장점에 매끈한 디자인이 귀엽지만 생각보다 두껍고.

그 외 들여다보는 중고 가리모쿠 의자가 하나 있고 - 있는 것이 낡기 전에 들일 생각은 없지만 - , 오래 전부터 눈여겨 봤던 그림이 하나 있지만 그를 걸만한 공간은 없어.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시는 분들 덕에 과한 포만감을 느끼는 즈음. 소유와 공간은 직결되지만 그를 만들고 욕망하는, 그리고 이어지는 감각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하고.

434.

음향 프로듀서와 스코어 작곡가를 이렇게 격렬하게 질투한 적 있었나.

분하지만 제 올해의 영화입니다.

433.

-그리고, 그런.

두 달 정도 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있고 나라를 대표하는 발표에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등떠밀려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영어로 대충 했고 직책이 곧 부여될 것 같다는 암암리의 소문에 사직서를 구상하고 있다.

별로 이야기하고싶지 않아 입을 다무는 순간이 많아 이상하리만큼 과묵하고 조용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주 숨이 막혀 먼 밖을 바라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회의의 요점을 지적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결론은요? 제가 정확히 뭘 해드리길 바라시나요?

온갖 배경을 늘어놓고 요점은 상대가 찾으라 하는 꼰대들만 상대하는 근간. 이래서 어린 이들이 도망치는구나, 하고.

담배가 늘어난 것이 약간 신경쓰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아름다운 보석과 잘 어울리는 목덜미를 봤고, 같은 독서 취향에 조금 웃다 모쪼록의 건필을 응원했으며. 단차가 낮은 좌석에 꼿꼿히 세운 등허리와 쉬도 없이 움직이는 고개에 거의 보이지 않는 무대를 보며 이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람들은 하루를 대여하지, 생각했다. 아주 즐겁고, 아름답고, 힘을 얻고, 사소한 것에 화가 나다 결국 마지막은 모두 행복했다, 라 귀결되는.

늘 빛나고 화사한 것들만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님들을 뵐 때마다 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네요. 그 마음을 자양삼아 저도 간신히, 바닥을 보이지 않는 하루를 보내려 애를 씁니다.

432.

작년 겨울과 올해 봄 사이의 긴 추위, 어쩐지 많이 마음이 힘들고 피로해져 중고서점을 들어갈 때마다 NJZ 앨범을 하나씩 샀다. 어느새 그 앨범들이 총 다섯 장으로, 하루에 마흔네 번 노을을 바라본 누군가의 기분이 이랬을까 짧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