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더이상 운영하지 않는다는 공지에 단 세 시간의 여유를 안고 그곳으로 내려가 창고의 모든 짐을 정리했다. 나뿐이 아닌 오며가며 필요한 사람들의 짐을 맡아주다 보니 청소로 시작한 정리는 어느새 발굴의 양상을 지니고. 건조 가능한 공간임에도 습기에 젖은 많은 책을 버리고 기증하고 내놓으며 이들을 통해 받은 위로와 고통과 괴로움과 기쁨의 지난 시간을 상기했다. 서적 구매의 마지막 사치는 집 장만이라는 오랜 격언까지. 


그래서 어떤 책을 가져왔어? 물음에 기증이 안되는 것과 앞줄에 있던 것들, 이라고 대꾸하자 선입선출을 이야기하며 웃는 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남자가 몸 담은 분야도 일감이 줄어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매주 해고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를까 조마조마하다는 초조함에 무언가를 보태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힘들면 여기 와서 뭐라도 같이 하자, 내 말에 다시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기가, 라 흐려지는 말 끝에 묻은 피로가 내 입을 마르게 한다.


나는 아직도 너와 함께 있던 그때 그곳의 꿈을 꿔. 


-내가 무슨 말을 더할 수 있다고.


어느 정도는 몇수를 예상할 수 있었던 지난 일과는 달리 한치 앞을 짐작할 수 없는, 순식간에 돌변하는 환경과 사람, 현재 상태를 미리 가늠하고 행동하기엔 내가 아직도 너무나 미진하여 그저 사건 하나하나에 매달리며 일희일비하게 된다. 직업과 분야를 바꾼 것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그나마 내세울 수 있었던 내 침착함과 안정성을 잃은 것만은 이를 물게 아쉬울 때가.


이따금은 그렇지 않나요.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마음 하나를 묻고, 그 마음과 함께 익사하더라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조금은 울고 싶게 바쁘고, 힘겹고, 몰아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은 나날이지만. 그래도 어떤 시간들을 생각하며 이 모든 부침을 견디기도 한다. 정말 작고, 낡고, 하찮은 공간이지만 다만 그 내밀어지는 발걸음을 생각하는 것으로 내일의 힘을 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