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많은 위대함들을 그저 잃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괴가 밀려들 때면 새롭게 떠오르는 이름들을 되새겨보곤 합니다. 그가 지면 위로 오르내릴만큼 거대하든, 혹은 나와 몇몇만이 알고 있든, 또는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이름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통해 세상이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조금 더 애를 쓰는 사람이길 바라는 어느 아침.


바람에 습기 대신 청량함이 짙어질 무렵, 너는 조용히 왔다. 조심스럽게 네가 일군 가족의 안부를 묻는 내게 잘 있겠지? 라고 웃어보이던 너. 너는 그렇게 내 침대를 쓰기 시작했다. 월등히 싼 월세를 제시했던 룸메이트가 한밤중 내 방을 찾아왔던 그 날. 사이좋게 도와가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그 남자의 말과 어린 내가 알아차릴 수 없었던 함의들이 숨막히게 몰려왔던, 오로지 슬리퍼 하나 만을 신은 채 너의 고시원으로 달려갔던 그 밤. 그 낡고 냄새나는 슬리퍼를 신은 내 발을 네 이불 속에 묻어주었던 그 새벽이 눈물나게 따뜻했던 것처럼 나도 네게 이유없는 따스함만을 주고 싶었기에. 


너는 고요했고, 오래 잤고, 나는 자주 네 코 밑에 손을 넣어 숨을 더듬었다. 너는 반짝, 눈을 뜨고 이야기하곤 했다. 병원 냄새가 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 


먹지도 않고 잠만 자는 너를 위해 나는 서툰 요리를 했다. 너는 자주 멍해졌지만 내가 만든 요리들을 바닥이 보일 만큼 먹어치우곤 금세 다시 잠에 잠기곤 했다. 언젠가 네가 물었던, 새집에 뭐가 필요해? -네가 읽은 책 한 권. 이라는 내 대답을 기억한 네가 가져온 책은 스물다섯의 어느 작가가 영수증과 함께 써내려간 짧은 에세이집으로, 이천 년 초반의 물가가 그러하듯 어떤 물건들의 가격은 어이없이 비싸다, 어떤 것은 또 생각치도 못할 만큼 싸곤 했다. 편의점 캔콜라가 이 때는 700원이었어, 킴스클럽의 전구도 700원. 우와. 내 실없는 중얼거림에 살며시 웃던 너는 다시 잠에 빠지고. 나는 읽은 문장을 또 다시 읽고 읽으며 내 출근, 혹은 너의 깨어남을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돌아온 집에 너는 없었다. 일주일 쯤 후 전해진 카톡에는 떡볶이가 먹고 싶었어, 라는 문장과 내가 아는 어느 시장의 기름 떡볶이집, 너와 네 가족, 내가 아는 네 아이의 얼굴이 남겨져 있다. 맛있었겠네, 답장을 보내며 너의 잠이 아쉽지 않았길 바라본다. 모쪼록, 이 좁고 작은 포근함이 네게 어떠한 방식이로든 위로가 되었기를. 


내 생각보다 나는 더 약하고, 이따금은 더 강하고, 이따금은 말도 안될만큼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즈음. 언젠가 사람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용서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하루를 더 살아가는 것은 매일 모르던 나를 용납하는 과정의 반복이구나, 하고.


-언어를 잊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자막 없는 다큐멘터리를 틀어놓고 갖가지 언어를 멋대로 떠올린다. 개자주 들여다보는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