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작은, 그렇지만 내게는 큰 도전 하나를 준비하느라 남자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한 시간 간격으로 동료들과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다시 치우고, 디저트를 사오고, 다음날 아침의 엉망이 된 스튜디오까지 일일히 중계하던 남자는 몇번이고 되묻는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는 언젠가 한동안의 고민 뒤에 남자에게 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사실 나는 내 멍청함에 대한 공포가 정말이지 커. 나는 단 한 순간도 멍청해질 수 없다고 말이야. 어떤, 내가 생각하기에 과분한 자리가 내게 주어지면 나는 도저히 이 자리가 내 것일거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멍청해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는 나 스스로가 이미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였어.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내가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이라는 누군가의 칭찬이 없으면 나는 걸어나갈 수조차 없었던 거야. 지식이란 내가 쌓는 것이지 누군가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잖아. 내가 첫 만남에서 내 외모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어려워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나는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내 외모가 아닌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가꾼,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주길 바랐어. 지금껏 내게 그런 컴플렉스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사실 내 멍청함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두려웠던 거야. 이건 할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이겠지.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나는 전혀 다른 분야를 시작했고- 이제는 지금까지 쌓아온 내 지식이나 인맥이나 외모가 아닌, 내가 일한 결과 하나로 평가받고 비난받고 칭찬받고 어쩌면 호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 나는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나를 좋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누군가 내 지식이 아닌 외모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 스스로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거지. 누군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내가 그럴 수 있을 만큼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지. 무언가가 모자란 사람들을 위해 많이 일하고, 적게 받고, 다시 받은 돈을 나누고.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저 그들과 함께 하는. 나는 지금까지 정면으로 나 자신과 맞선 적이 없었던 거야. 내게도 노력은 필요해. 시간이 필요해. 이기적이란 걸 알지만, 그래서 정말 미안하긴 한데.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러니까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한숨을 쉬었고. 그 시간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 영원히 헤어지게 되어도? 나는 조금 머뭇거렸지.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만약 그렇게 되면 내게 다시 이야기를 해주겠어? 최대한 생각해볼게. 조금 웃었던 것 같기도 하지. 적어도 네 그 시간들에 헤어짐이라는 가정은 없는 거네. 그러면 됐어. 너는 괜찮은 거지? 정말 괜찮아? 그 때와 동일한 어조의 괜찮냐는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현재 읽고 있는 책을 찍어보내거나, 보고 있는 영화의 마음에 드는 대사를 써보내거나 웃는 이모지를 보내거나 하며.


홀로 조용하고, 그러나 외롭지는 않은. 만족스러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굳이 영어 나레이션과 서양인 - 좋은 학벌을 지닌ㅋ - 의 관점을 빌릴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 일본식 사대주의란 - 그 자체로 완성된 삶의 모습이지만 메인을 점하고 있는 참치 경매장에서 일하는 여성 중간 도매상은 단 1명도 없으며 부자재 측에서만 겨우 1명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내내 되풀이되는 그들彼ら이라는 표현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또한 감독이 자랑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몇대를 이어 내려온 관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프로. 속는 것은 본인의 잘못'이라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그 켜켜이 겹을 이룬 카르텔이란.


재료의 중요성과 그를 대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룬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경외를 다루고 있음에도 제겐 일본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량한 케릭터, 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는 것에 격세지감. 영화는 잔잔하고 아름답고 서서히 일렁입니다. 다시 월요일을 시작하는 Paterson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감동이란.


제가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왜 굳이?의 장면이 지나치게 많은데다 이런 식의 스토리 텔링이라면 저라면 극영화를 쓰고 그의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CG와 유화를 함께 도입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그저 거대한 낭비.


그림과 목소리만으로 그 배우들을 온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 조금 흥미로웠나. 그 인물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Poldark;_;이 떠오르기도 했고.


"나는 세상이야. 나는 변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모조리 여성 케릭터에게 떠맡기고 + 종국에는 그 부조리를 견디지 못한 소년 케릭터가 그를 없애버리는 정말 기념할 만한 여혐 영화이지만 성장도 뭣도 없고 아 시발 희망이고 뭐고, 라는 감독의 태도와 촬영과 조명, 미술, 시대적 상황에 천착하는 그 취향이 정말이지 좋더군요. 그 디테일만으로 3시간 57분을 버틸 가치가 있는. 


각설하고, 정말 좋았습니다.


리부트 따위로 기존의 인물을 지우기에 급급했던 시리즈들과는 달리 이토록 정중한 - 너무나 지극한 팬이기에 부여할 수 있는 - 디딤으로 마련된 엔딩이라니. 그들은 영원히 남아있는 전설이 됨과 동시에 모든 전설이 그러하듯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스스로는 절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되겠지요. 어떤 질긴 과거를 지녔던 지난 시간들은 닫히고 새로운 인물들을 위한 미래는 열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라면 general도 없앴을 테지만, 일단은 구심점의 역할이. 


레이의 기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또한. 가능성을 지닌 모든 자들, 어쩌면 주어질 수도 있는 기회.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빗자루로 라이트 세이버의 흉내를 내고, 우주선을 타고 싶어하고, 눈에 들어오는 별을 향해 나아가지요. 그 별빛을 손에 넣기 위해. 


특히나 스노크를 썰고 난 뒤 레이와 등을 맞대고 전투를 준비하던 벤 솔로의 모습은 제 올해의 장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선천적 재능이 없는 자들을 보는 관점에서 엑스맨 생각이 정말 많이 난.


길게;_; 쓰려는 마음에서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