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마저 노래하는 듯한.
상당 부분을 배우가 지닌 이미지에 기대고 있지만 영화 정말 좋더군요. 상상했던 것보다 유머와 이야기의 밀도가 깊습니다. 언어가 지닌 운율과 의미를 아는 감독이 영상과 편집, 사운드를 다루면 이런 영화가 나오겠지, 라는 생각을.
전혀 다른 플롯과 맥락입니다만 시와 언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Paterson이 떠오르기도.
너의 입술산이 생각보다 높았다거나 네 눈매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운 윤곽이었다던가, 네겐 아이보리보다 오프 화이트가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거나, 내 머릿속의 너보다 언제나 내 눈앞의 네가 훨씬 더 미인이었다거나. 이 모든 내 생각과 현실의 너 사이의 괴리를 접어두고도 너는 내가 언제 어느 때고 친한 친구, 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연이 깊고 벽이 낮은 사람이었다고.
시작되는 너의 새로운 관계를, 시간을, 막을, 그리고 너의 결혼을 축하해.
간만에 학교에 들러 교수님을 뵙고, 아직도 졸업 안한(...) 혹은 위로 진학한 동기들을 만나고 받은 것들. 학생 공모 디자인 다이어리 시절에는 나도 몇몇 동기들과 의기투합하여 아이디어를 냈던 과거도 문득. 줄임말을 달력에 떡 하니 박아놨길래 - 내가 기억하는 옛 총장은 저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 케이아츠는 포기했나 싶었는데 다이어리를 보고 흠. 모두가 칼아츠 짭이냐며 투덜거렸던.
대부분 영상이나 디자인북을 탐독하기에 줄글로 된 책을 읽는 이들이 드물어 대기 예약 없이 하루 열댓권의 책을 빌려 삼사일 만에 내리 읽곤 했던. 그렇기에 다독으로 졸업 때까지 도서관 근로장학생 - 경쟁이 치열했다 - 신분을 유지할 수 있던 기억도.
지금보다 치열하게 희망하고, 절망하고. 더 자주 울고 웃고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했지.
언젠가 모 동기의 야 솔직히 우리 뭣 좀 있지 않았냐? 물음에 코웃음치며 우리가 뭣 좀 있었으면 넌 이미 나랑 사귀고 있거나 헤어진 상태일 거임, 대꾸할 만큼 열정적으로 연애를 했고. 내 방 호수가 어디인지 모를 만큼 기숙사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며 생활하다 보증금 50, 100만원짜리 반지하와 옥탑을 전전하기도. 그런 내 생활을 불쾌하게 여기던 애인도 몇 있었지. 좀 제대로 된 곳에서 살면 안돼? -월세 내줄 거 아니면 입 다물어, 라 윽박지르긴 했지만 그런 누추함이 질기게 부끄러웠던 시간도 없진 않았고.
밥을 먹기 위해 선배 동기 후배의 현장을 뛰던, 가난이 그저 내 죄인 것 같았던.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모는 내 모습을 흥미롭게 여겼지만, 나는 대치동의 학원 강사였던 시절 차가 끊기면 돌아올 택시비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그냥 모르는 척 웃었지.
언젠가 모님이 탐라에서 거론한 서울, 서울살이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 모든 지방러의 꿈이 아닐까. 신분증에 아로새겨진 서울시의 주소를 가지는 것, 그리고 그 주소를 2년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을 지니는 것. 내가 온전히 나로서,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내 직장과 내 수입만으로 그러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나를 이룩하는 것.
이런 나 자신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또 몰라주기를 바랐던 새파란 시절의 나를.
태양은 그 환한 빛으로 어리석은 날 가르치네
당신은 따뜻한 온기로 얼어붙은 날 데워주네
언제나 아무 말 없이
그대 손으로
그대 손으로
-온기에 리듬이 있다면 이런 운율일 것이라 생각한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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