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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맘 때면 깊게도 떠오르는.

네 다정이 내겐 언제나 빚이었어서. 나는 더듬거리듯, 주춤거리듯 간신히 낮은 마음을 고백하고.

죽을 만큼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걷고 말하고 돌아다니고 설명하고 팔고 웃고 메일 주소를 나누고 그럼 내년에, 라는 말로 악수를 대신했다.

달여를 비운 집은 채워진 먼지와 묵은 공기, 공과금 용지와 언 수도로 나를 약간 지치게 만들었지만 쌓인 일거리를 해소하는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고.

창을 열자 위아래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에 문득. 갓 스물이 되었을 무렵 아르바이트처의 친목에 정신없이 빠진적이. 그러다 당구-카드-블랙잭-도박이라는 큰 도돌이표에 휘말려 기준만 유지하면 되는 기숙사며 장학금 모두 탈락한 채로 새벽 네시의 푸른 밤과 눈을 보던 기억이 있다. 천사백만 원의 빚을 진 명세로 그냥 죽을까, 한강에 갈까 담배를 물며 생각했던. 정말 온전히 내 잘못이라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리고 일주일 후 모 주식이 터졌고; 나는 빚을 모조리 갚고 그 판을 떴으며 지금도 백원을 벌어도 번것이라 생각하기에 뭐든 잘 포기하고 별 미련도 없으며 로또, 가챠 등지의 확률이 개입되는 게임은 전혀 하지 않는다.

내게 온 행운이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사람의 마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늘 무르고.

아무것이었고, 또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 하나의 존재.

직접 경험이 책 영화 등지의 간접 경험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문득 근간에는 내가 해봤다, 의 언사와 인증이 지나치게 중해진 것 같기도.

어쩐지 아프다는 소식을 많이도 듣고 있는 요즘. 모쪼록 천천히 건강 보살피시고, 내년에는 여전한 얼굴로 뵐 수 있길 소망해봅니다. 평온한 연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