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의무제.’ 현행법은 가난의 책임을 모두 다 개인에게 떠넘기기 바쁘다.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두 가지다. 동정하거나, 비난하거나. 결국, 모두 ‘네 탓’이라는 거다. 네가 무지하고, 무력하며, 무능해서 안 됐지만,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게을렀던 건 모두 ‘개인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노동을 열심히 했음에도 가난하다면 그건 네가 분수에 맞지 않게 낭비를 해왔다는 증거다!
이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일종의 모욕이다. 고되게 노동하며 살아온 가난한 노인에게 주어진 삶은 두 가지뿐이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동을 하거나, 멍하게 방 안에 앉아 TV를 보거나. 오늘도 TV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새로운 기계가 끊임없이 소개되고, 그들의 자녀들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점점 기계가 대체하는데,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모욕당한다. 모욕당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은 내 방뿐이다. 주기적으로 리모델링을 해줘서 멀끔하고 비도 새지 않는 안전한 내 집, 내 방. 인간(人間)이란 단어에 ‘사이 간(間)’ 자가 들어간 건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관계’와 그 안에서 받는 인정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복지정책은 그 관계를 끊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기저에는 가난에 대한 깊은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가난한 개인을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방에 들어앉을 ‘누군가’가 계속 바뀔 뿐이다. 방 안에서든, 밖에서든 이제는 ‘노동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그려내는 힘이 필요하다.
-더이상 사랑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런 글을 고민한다.
안와가 깊고 턱이 뚜렷한, 그리고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책망할 수 있는. 그 윤곽과 태도가 미친 듯 좋았지.
현장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내 언어도 깎여간다. 아주 조금씩, 사소한 것부터.
그때의 그 이상한 열기가 그립지 않다는 것도 거짓말이겠지.
오늘 처음, 완만하게 굴러떨어지는 듯한 환자의 죽음을 봤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어느 선배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선생님.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연신 손을 놀렸고 선배 또한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 무거운 소란.
모든 끝과 처음이 그렇듯, 포기하는 마음에도 각오는 필요하다.
최근 봤던 햇살 같은 영화들 틈으로 독야청청한 좆같음을 자랑했으므로 기록. Rampling의 고고한 연기를 제외하고는 장점이 1도 없음. 특히나 엔딩ㅋㅋㅋ 아 그러세요. 날 배신한 여성에게 부여되는 평생의 불행은 당연한 것이지만 곧 죽어도 깐깐한 노년 남성의 자기반성에는 박수를 줘야겠지요.
이제 슬슬 워킹타이틀식 때깔 고운 영국영화에 대한 희망을 버려야할 듯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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