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내 세계에는 없는, 어떤.

여름에는 이디스 워튼을.

더위로 타들어간 뒷목을 스치는 서늘한 옷깃의 감각. 삼백육십오일 트레이닝복을 걸쳤기에 제대로 교복을 입어본 기억은 드물지만 그럼에도 그 교복을 좋아했던 이유.

너는 조용히 왔다. 큰 몬스테라와 작은 바질을 가지고. 살아있는 생물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그 지친 얼굴 위로 흘릴 수는 없어서, 실외기 위에 화분 두개를 올리고 물을 주고 반짝반짝 선명한 해가 묻은 잎사귀를 오래 바라봤다. 네가 죽은듯 자는 동안. 너는 잘 먹고, 잘 잤다. 끼니마다 밥과 빵과 스파게티를 먹고 복숭아를 먹고 오렌지를 까먹고 오래되어 형태가 찌그러진 방울토마토를 나와 나눠먹었다. 서랍장 하나가 고장나 자주 당근을 뒤지다 거의 매일 겉옷을 걸치는 내게 조용히 물었다. 같이 가도 돼? 따릉이 초대권을 보내고 비틀거리는 네 자전거의 뒤를 따르고 부품을 확인하고 낯선 이름 앞에 입금을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네게 돌아오는 내게 너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두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날벌레를 열마리쯤 먹고 이제는 져가는 장미를 함께 보고 먼지와 꽃가루로 엉망이된 몸을 교대로 씻어내고. 고요하고, 고요하고, 조용한 나날. 피와 시체와 주술과 욕설이 뒤섞인 드라마를 내내 틀어놓은 내게 너는 여전히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거 틀까? 라는 내 물음에 아니. 너 보던거 봐. 라는 그 꺼질듯한 대답이. 있는듯, 없는듯. 아무런 존재감도 그 어떤 열망도 없이 너는 있다, 갔다. 지는 해가 못견디게 뜨거웠던 날, 대문을 열고 들어와 가지런히 정리된 침구에서 너의 부재를 읽은 나는 샤워를 하고 늘 보던 드라마를 혼자 보고 같이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고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를 했다. 너와 함께 울퉁불퉁 살점을 잔뜩 깎아냈던 복숭아 껍질을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며 기도처럼 되내었다. 네가 내 집에서처럼 어디서든 잘 자고 잘 먹기를. 네가 소중히 데려온 몬스테라와 바질처럼,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