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Maria Sibylla Merian의 그림을 볼 때마다 권교정 작가의 문장을 떠올린다. "전혀 아름답지 않아도 좋으니, 언젠가 온전히 내 것을." 이라 중얼거리던 정언의 섬세한 옆모습을. 

 

뇌리에 박힌 어떤 장면, 어떤 문장, 어떤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그와 함께 했던 과거는 더욱 더 생생해지고. 나 또한 이제는 나아갈 길 보다 돌아볼 나날이 더 많아진 중년에 다가선 나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화자와 세계가 유리되지 않았던 순간,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세기의 사건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던. 세상 모든 달력과 스케줄표에 점을 찍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라 멋대로 인과의 꼬리표를 달고 싶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일정 부분 묻히고 흐려지고 닳을 수 밖에 없는, 그저 매 순간 피가 배는 듯한 감각만이 생생한 하루하루의 과거를 흘려보내고 있는. 

 

이따금 생각한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구나, 하고.

 

미처 마르지 못한 공기가 축축했다. 이른 아침의 젖은 공기로 폐를 채울 때면 여자는 Ellie와 함께 했던 온천의 그날을 떠올린다. E로 끝는 Anne과 같은, 반복되고 휘어지는 두 개의 철자로 이루어진 Ellie. 무신론자를 표방한 적 없지만 누구도 믿지 않겠다는 듯 단단한 이마를 한 Ellie 앞에서 여자의 신은 자주 누추해졌다. 그래서 여자는 입술을 다물었다. 여자의 신은 언급하지 않음으로 간신히 그 실체를 유지했다. 모든 곳이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전능해진 신. 

 

자기만의 방이 20세기의 담론이었다면 21세기적 담론은 책상 대신 식탁을 지닌 여성이 아닐지. 책과 노트가 필기구가 놓인 책상이 필요한 이유. 쓰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한 과정들. 그리고 복수하지 않는 여자들. 

 

모든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 사회가 살고 있음이, 내 발화가 오로지 인증으로 뒷받침될 뿐인 피로함이 싫어 더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인터넷으로 거대한 단일 지구촌을 건설하겠다던 사이버 유토피안들의 비전은 완벽히 실패했다, 라.

 

-뜬금없이 발견되는 메모들.

 

바쁘고, 이따금은 울고 싶어지고, 가끔은 작게 웃기도 하는. 저는 사는 것처럼 간신히 살고 있습니다. 다들 안녕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