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늘 이맘 때면 깊게도 떠오르는.

네 다정이 내겐 언제나 빚이었어서. 나는 더듬거리듯, 주춤거리듯 간신히 낮은 마음을 고백하고.

죽을 만큼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걷고 말하고 돌아다니고 설명하고 팔고 웃고 메일 주소를 나누고 그럼 내년에, 라는 말로 악수를 대신했다.

달여를 비운 집은 채워진 먼지와 묵은 공기, 공과금 용지와 언 수도로 나를 약간 지치게 만들었지만 쌓인 일거리를 해소하는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고.

창을 열자 위아래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에 문득. 갓 스물이 되었을 무렵 아르바이트처의 친목에 정신없이 빠진적이. 그러다 당구-카드-블랙잭-도박이라는 큰 도돌이표에 휘말려 기준만 유지하면 되는 기숙사며 장학금 모두 탈락한 채로 새벽 네시의 푸른 밤과 눈을 보던 기억이 있다. 천사백만 원의 빚을 진 명세로 그냥 죽을까, 한강에 갈까 담배를 물며 생각했던. 정말 온전히 내 잘못이라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리고 일주일 후 모 주식이 터졌고; 나는 빚을 모조리 갚고 그 판을 떴으며 지금도 백원을 벌어도 번것이라 생각하기에 뭐든 잘 포기하고 별 미련도 없으며 로또, 가챠 등지의 확률이 개입되는 게임은 전혀 하지 않는다.

내게 온 행운이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사람의 마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늘 무르고.

아무것이었고, 또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 하나의 존재.

직접 경험이 책 영화 등지의 간접 경험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문득 근간에는 내가 해봤다, 의 언사와 인증이 지나치게 중해진 것 같기도.

어쩐지 아프다는 소식을 많이도 듣고 있는 요즘. 모쪼록 천천히 건강 보살피시고, 내년에는 여전한 얼굴로 뵐 수 있길 소망해봅니다. 평온한 연말 되세요.

383.

어딘가 무언가 반드시 있는 것처럼.

급하게 읽을 책를 찾아 어느 중고샵에서 1유로에 샀는데 생각보다 정말 좋았던. 내 올해의 책.

입 속에 들어가는 것에 큰 관심이 없기에 - 생존의 유지와 욕구와 경애의 발현이 같은 창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늘 나를 괴롭게 하고 - 화제가 된 무언가가 정말 맛있다고 느껴본 기억은 드물지만. 그 와중에 정말 다르다고 생각했던 드문 음식.

나는 아직 거리를 걷는 중으로.

전두엽을 간지럽히는 리듬을 이유없이 흥얼거리고.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한다.

Who's got a beard that's long and white?
Santa's got a beard that's long and white
Who comes around on a special night?
Santa comes around on a special night
Special night – beard that's white
Must be Santa, must be Santa
Must be Santa, Santa Claus

Who wears boots and a suit of red?
Santa wears boots and a suit of red
Who wears a long cap on his head?
Santa wears a long cap on his head
Cap on head – suit that's red
Special night – beard that's white
Must be Santa, must be Santa
Must be Santa, Santa Claus

Who's got a big red cherry nose?
Santa's got a big red cherry nose
Who laughs this way: "Ho-ho-ho"?
Santa laughs this way "Ho-ho-ho"
Ho-ho-ho – cherry nose
Cap on head – suit that's red
Special night – beard that's white
Must be Santa, must be Santa
Must be Santa, Santa Claus

어쩐지 가장 좋아하는 이 시기의 노래.

어느 공원을 조용한 인사와 거닐고 있을 때. 쨍하고 깨질듯한 공기와 흰 입김을 함께 바라보며 가늘게 들려오는 음악이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인 걸 알아차린 순간.

이른 인사를 남겨봅니다. 즐거운 연휴, 춥지 않은 주말 되세요!

382.

어떤 기억들.

많이 배우고 늘 느끼는, 짬을 내어 다녀온 미술관과 도서관마저도 마스크 너머 감탄을 감출 수 없는 여정이지만. 해 지자 마자 돌아간 호텔 TV 프로그램이 제일 재밌었다거나 환승 공항의 라운지 체어에 누워 뜨고 지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일정이 내 몸에 가장 편하다는 것을 알아버리는 것도.

잠깐 시간을 보낸 도쿄의 어느 공원과 어느 도로는 디디는 곳곳마다 울며 걷던 기억밖에 없어 먼 과거의 나를 약간 측은해하게 되었다.

거의 음악을 듣지 않고, 그저 타국의 언어와 방송을 많이 듣고. 다시 끝도 없이 읽고 읽고 또 읽는 나날.

오래 전자우편으로 소통을 했던 협력처의 누군가는 내가 안면을 익힌 다른 누군가를 이야기하며 두루 인정받는 전문직이기에 봉인할 수 있었던 선고를 이야기하고. 다음날부터 나는 어떤 눈으로 그 사람을 봐야할지 몰라 마주치는 시선과 접혀드는 눈매를 내내 피하고.

그럼에도 조금도, 집이 그립지 않은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