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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매일 갔다;_; 


사람을 물리적으로 초라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시스템이라면, 정서적인 누추함을 덜어주는 것이 예술이며 그를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언젠가 셜록에서의 Beautiful, isn't it? ...I thought you didn't care about. -Doesn't mean I can't appreciate it. 대화가 생각나기도. 


디오티마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아서 맥스웰이 자신은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면 일어날 일들의 끔찍함을 알고 있기에, 이사회가 불평을 토할 정도로 많은 금액을 기부한다 말하며 상대의 꿈을 묻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따금은 나도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탄생하고 사라지는 예술들을 생각하며 - 물론 나는 이러한 것들을 아주 좋아하고 관심도 있는 편이지만 -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금액은 예술품의 복원과 보관을 위해 지원하고 있다.


희망은 가장 잔인하게 현재를 찢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지만 꿈은 적어도 내 참혹을 도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쉬운 통로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현대 미술에서 untitled 혹은 no title, 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작품을 나는 작가의 직무유기라 여긴다. 자신이 생각한 주제와 의미를 관객들에게 가장 간단 +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저버리는 무책임이므로.  


예술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인지하고 있는 상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개봉하면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러저러 일본과 엮이게 되어 줄 수 있는 도움은 주고자. 쇠고기로 갚겠다는 이야기에 난 이제 병원 일 아니면 부탁을 받지도 사례를 받지도 않기로 했다는 대답에 웃어주는 멋쩍음이 좋았다. 자막 검수를 위해 낮은 해상도로 들여다 본 영화는 좋을 것이라 상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몇십 배 몇백 배는 더 좋아 몇번이고 플레이를 멈추고 숨을 몰아쉬곤 했다. 


아, 정말 너무 좋네. -돈을 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임계를 넘어선 내 호감이.


뭐가 좋았고 무슨 배우가 굉장했고 어느 씬의 연기가 좋았고 어디의 사운드가 좋았고 여기서 음악은 빼는 게 어떨까 싶은데 여기 로케이션은 어떻게 헌팅했냐 미술팀 고생했겠네 자연광 너무 좋더라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다 다들 연기 진짜 좋았어, 라는 내 감탄에 여성 배우가 많이 나오죠ㅎㅎㅎ 라는 대답에 마음을 긁혔다. 너는 단 한 번도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놓은 적 없지. 


모쪼록 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빨리,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길.   


뜬금이지만 내 일과의 루틴을 깰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나는 정말 먹는 것과 그를 평가하는 행위, 이후의 기억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반복되는 생활에는 어딘가에 도착하면 무언갈 꺼내어 먹는다, 식사 시간에는 밥을 먹는다, 의 규칙을 지킬 수 있지만 이 루틴이 사라지면 뭐 굳이, 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터라. 먹는다는 행위가 다른 많은 것들보다 우위에 있지도 않고 꾸준히 자신의 음식과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는 사람의 성실과 섬세함에는 존경에 가까운 외경심을 품고 있지만 딱히 해당 곳곳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거의 없다. 혼자면 귀찮고;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식사를 챙기는 일은 정말 마음을 놓은 상대가 아니면 내겐 힘든 일이기에. 성장기에 몰두했던 운동 탓으로 활동 반경에 따른 칼로리와 3대 영양소 정도는 고려하지만 그 외 다른 것들을 신경쓰고 싶지 않기에 길을 다니며 대충 뭔가를 물고 있거나, 맛과 상관없이 꽉꽉 채울 수 있는 장소인 부페 등지를 좋아하고, 뭔가 신경을 써야 할 일들이 생기면 사나흘 정도는 끼니를 거르기도 한다. 어렸을 때야 체력으로 술의 맛이 아닌 취함을 즐겼지만 나이가 드니 그것 또한. 


하루이틀을 같이 보낸 누군가가 참다 참다 나는 배가 고픈데, 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을 들으며 어마어마한 미안함을 느꼈다. 정말 나는 함께하기에 알맞은 종류의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103.

My name's Fiona May, but in court, it's My Lady.

-So you've come to change my mind, My Lady?


The Children Act 개봉하네. 그 피오나가 Emma Thompson이라니... ;_;


Down by the salley gardens my love and I did meet;

She passed the salley gardens with little snow-white feet.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But I, being young and foolish, with her would not agree.


In a field by the river my love and I did stand,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She bid me take life easy, as the grass grows on the weirs;

But I was young and foolish, and now am full of tears. 


8을 설명하기 위해 0을 시작하는 일은 늘 나를 누추하게 만들고.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 


내 취향인 파인애플 피자와 함께 방문한 모님 댁에서 케이블의 캡아 시리즈를 보며 실컷 수다를 떨었다. 협정이고 자시고 막판에는 제 정신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1도 없는 Civil War를 끝내며 모든 귀결을 스터키로 주장하는 모님의 말과 웃음과 단호함이 쏟아진다. -아, 저는 요새 루트랑 쇼가 너무 좋아서요. 이래저래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완곡함에도 아랑곳 않는 그 우렁우렁한 미소에 위로받는다.  


사람이 이렇게 거대하다, 정말.


요즘 자기 전 거의 매일 보는 것은 모님의 입덕 계기에 관한 글, 출근 전 꼭 한번은 들여다보는 것은 다른 모님의 엄마가 깨우는 방법이라는 만화. 특정 에피소드가 있더라도 그 생각만으로 혼자 이미 웃어버리고 마는 나로서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일을 담담하게, 그러나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만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이들을 존경에 가깝게 경애하는 편인데. 이 두편의 글과 만화는 언제나 단단한 애정을 받고 자라 그 감정을 나눌 수 있게 된 사람에 대한 정교한 묘사라 정말 좋아한다. 


-그토록 견고한 너는 내게만 약하지. 내게만 물렁하고 내게만 상처받지. 오로지 이런 나에게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진도 숭배한다. 스카프 앞에 무릎을 꿇기도 한다. 그들은 건물 벽을 바라보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뭐든지 그들을 덥혀주고 태워버리는 연료에 불을 붙일 수 있다. 라는 문장이 계속 맴돌아서. 나는 그 피묻은 붕대 앞에 무릎 꿇은 루트가 보고싶은 걸까.


 언제나처럼 시간은 흘렀고, 마음의 통증도 무뎌졌다. 그 일에 대해서 화를 내고 눈물을 짓던 손님들도 더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어떤 손님들은 도리어 이 이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피로를 토로했다. 여자는 그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재차 마음을 다쳤다. 입을 다물고, 헤어롤을 말고 커트를 했다. 그이들에게 커피를 줬다. 여자는 진심으로, 그 누구도 증오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여자는 부모와 남편의 죽음을 겪으며 자신의 일부가 죽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마음 속에서 죽어 없어진 그 부분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한동안은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오래도록 울고 나니 그들이 없는 삶과 그들이 여자에게 남겨놓은 세상이 남았다. 그 모든 것들이 여자에게는 소중했다. 여자는 여자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그들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고, 전보다 나아진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슬픔으로 깨끗해진 마음에 곱고 아름다운 것들만 비춰 보여주고 싶었다.

102.

강제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에서 그만둘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여성의 신체를 사용하는 영화를 찍으면서도 그 신체를 관음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 큰 점수를 줍니다. 이 영화에서 포르노적으로 응시되는 육체를 지닌 유일한 이는 늙고 노쇠했지만 스크린 밖의 대스타인 Aamir Khan이지요.


1년만, 이라는 제약에서 패배의 분함을 스스로 깨달을 뒤 연장되는 훈련 과정이 흥미롭더군요. 싫음을 인지하는 것도, 좋음을 받아들이는 일도 어쨌든 그를 접할 수 있는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국가주의라는 거추장스러운 체계가 존재하지만 이 체계가 오히려 이 여성들에게 특정 기회와 영광을 부여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쩌면 이 영화가 기반이 되어 더 나은 영화가, 혹은 이 영화를 빌미로 더 나쁜 영화와 실례들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 구심점으로 자리할 만큼 묵직한 영화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얼굴 너무 굉장하고;_;


나를 위한 기록. 키스미 마스카라 쓰지 말 것, 너의 능력으로 지울 수 없다ㄱ-

101.

Solo 봤고 Han 곁에 있는 Qi'ra의 존재 의미 대체 무엇? 


모든 것에 반항하다 그 모든 구석에서 쫓겨나는 뻔하디 뻔한 남자'애'보다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간 Qi'ra의 단독 영화가 훨씬 근사해보였는데. 


조연, 즉 어느 정도 모르는 구석이 있어야 흥미로운 케릭터를 굳이 주연으로 데려와 이야기를 부여하니 이미 결론지어진 케릭터답게 서사가 얄팍해질 수 밖에.


L3-37 진짜 미묘하더라. 디즈니답게 메타의 메타의 메타가 겹침. 


무생물에 노골적인 성을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변태적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그 음성과 행동거지로 인해 K-2SO를 당연히 대표 성, 즉 남성이라 여긴 나 자신을 좀 반성하기도.    


아주 오랜 친구들과 만나 인터넷 없는 공간을 빌려 사흘쯤을 같이 보냈고, 그들도 나도 일 또는 세상과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밥을 먹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내 호감을 기반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고분고분하게 구는 편이라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나를 바꿨다 큰소리를 내곤 하는데, 진짜 지금의 내 토대를 만들어준- 가출한 나를 잡아와 도서관에 앉혀놓고 독서실에 데려가고 문제집을 빌려주고 엎드린 내게 다시 연습장을 밀어넣으며 왜 공부를 하지 않냐고 버럭버럭 화를 내던, 이들은 나를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넌 진짜 눈치가 없었고, 지금도 딱히 눈치가 빠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이긴 해. 눈치라는 건 일종의 알력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이랑 몸을 사릴 줄 아는 자센데. 그때 넌 어쨌든 여고였던 우리 학교에서 중성적인 걸로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고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지. 네가 무슨 행동을 하든 이상하게 동경하는 애들도 많았었고. 화려하게 학교를 뒤집어놓고 다음달인가 자퇴했지. 넌 지금도 아 그랬어? 난 진짜 몰랐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건 네가 그만큼 관계에 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애들 틈에 섞이려는 의지나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고, 그 관계에 얽매이지 않아도 넌 언제든 원하면 그걸 가질 수 있었으니까, 넌 그냥 몰랐다고, 그랬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그건 하지 않아도 됨, 이라는 권력이었던 거지. 너 학교 때려치고 알바할 때 애들이 거기 가서 몰래 보고 와서 얘기 꺼내고 했던 것도 모르지?    


타인의 눈으로 내 과거를 읽어주는 걸 듣는 것도. 어쩐지 간지럽고 기이하고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먼, 이제는 완전히 대상화되어버린 과거의 누군가. 


몰입과 집중도가 좋은 편으로 접하는 것들에게서 영향을 심하게 받는 나는 어느 정도 취향이 갖춰진 이후부터 아, 이건 안되겠는데. 싶은 매체는 당장 그만두는 편이지만 몇년이 지났음에도 이건 괜히 봤다, 싶은 것이 하라다와 모 동인지. 작금처럼 일찍 성적인 것들을 접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그에 대한 대비와 스스로의 호오를 미리 다져야 하는 세대에게 불가, 딱지를 붙이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럼에도 12세 미만 정도의 규칙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시기 특유의 신체 및 정서 변화mood swing로 인해 내 윤리과 가치관에 충격을 주는 것이 곧 내게 자극적인 것 - 특히나 성적으로 - 으로 착각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


충격 이후의 자극과 공포 중 무엇이 나은가에 대한 지리한 토론을 벌인 기억도 있는데, 공포는 또 애먼 신론주의나 결벽을 불러오기 일쑤라.


마지막 필름 카메라의 단종 소식에 우리 세대에게 활자는 너무 느려요! 라고 말했던 이가 떠오르기도. 그림 혹은 만화책에서 단문 혹은 기술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 곧바로 유튜브와 동영상의 세계로 접어드는 이들에게 활자로 자신만의 세계를 상상하고 다시 또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일은 느릴 수 밖에 없고, 모니터 없는 필름 카메라와 네거티브 필름, 이후의 인화라는 과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겠지. 세계는 점진적으로 연상을 없애는 식으로 발전하는 구나, 하고. 


-그러고보니 언젠가 이 조사 결과가 첨예하게 갈리는 것이 재미있었던 듯. 저는 소설의 삽화는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은영전 흥하길래 생각없이 팔로한 계정이 그 분이라 엄청 놀람; 쇤코프 너무 좋아해서 그 특유의 무기를 센티넬-가이드 버전의 모 커플에게 쥐어준 적도 있는 저는;_; 본편보다 율리안의 일기였나 외전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다시 읽으라면 제 안의 민주주의가 들끓어서 못 펼칠 고단의 원서라. 

100.

나는 자주 Misogyny는 여성착취로 번역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안 좋은 종류의 영화라 기록. 모든 면에서 삐뚤어졌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여성을 반복되는 죽음으로 단죄 + 개도시키고 그 다양한 죽음의 면면들을 포르노적으로 묘사함. 물론 반듯하고 이성적이고 조금 너드스럽지만 구원하는 남성 케릭터는 덤이고. 


모든 여성 케릭터가 너무나 납작하여 정말 덧붙일 말이 없는.   


이런 영화가 작고 알차며 아이디어가 좋다, 라는 평가를 받는다니. 


-"No man likes to have his story capped by a better and fresher from a lady’s lips," she wrote. "What woman does not risk being called sarcastic and hateful if she throws the merry dart or engages in a little sharp-shooting. No, no, it’s dangerous—if not fatal." Or as Joan Rivers puts it, "Men find funny women threatening. They ask me, 'Are you going to be funny in bed?'"


"I chose you for exactly who you are, but there's something I think Root had wanted to say to you. You always thought there was something wrong with you because you don't feel things the way other people do. But she always felt that was what made you beautiful. She wanted you to know that if you were a shape, you were a straight line. -An arrow."


아주 곧은, 화살과 같이.


반사회적 인격 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의과대학의 정교한 수련을 완료한 여자는 자신의 병명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반응, 놀람, 경악, 혼란, 대부분의 공포와 아주 약간의 동정 사이에서 여자가 느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감정이란 결국 전두엽과 측두엽이 관여하여 신체 어딘가를 들끓게 하는 전기 신호일 뿐이다. 이제는 명백히 유전적 결함으로 밝혀진 그 질환은 여자가 관여할 수 없는 머나먼 선조와 선조들의 DNA를 통해 내려온 것으로, 여자는 자신의 결핍을 밝히는 것에도 그에 연이은 반응에도 감정이 아닌 자신만의 규범으로 행동하는 스스로에게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은 감정을 삭제하는 대신 감각의 극대화라는 자기 방어를 가져왔다. 부드러운 베어의 등, 마요네즈 없이 할라피뇨가 잔뜩 들어간 차이나 타운의 샌드위치, 오래된 지하실의 묵은 쇠냄새, 경쾌하게 돌아오는 SIG의 방아쇠, 벨벳처럼 미끄러지는 루트의 목소리. 여자가 지닌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기억 또한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다른 이와 함께 한 사진을 기록에 이용하는 이유는 특정 시간대의 감정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기억은 감정이 묻은 이후에야 비로소 누군가의 추억이 된다. 여자에게는 사진도, 그 위에 지문처럼 남은 기억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비로소 여자는 기계에게 말을 건넨다. -루트. 35와트의 LCD 모니터는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루트의 사진을 띄워보낸다. 여자가 아는, 웃고 말하고 협박하고 달콤하게 속삭이던 루트와 다른 듯 닮은, 루트라 명명되고 여자에게 기억된 존재. 여자는 그 사진을 통해 루트의 죽음을 상기한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가? 여자는 기계에게 묻고 싶어진다. 여자에게 사랑이란 욕망과 연계된 열렬한 감각이다. 발 딛는 곳을 잊고, 바라보는 곳을 잊게 하는. 심장이 뛰고 침이 마르며 도파민 분비가 활발해지고 숨이 차며 머리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열이 올라 오로지 상대와의 거리가 사라지길 바라게 되는, 그저 접하고 접촉하며 맞닿아 스스로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기를 열망하는.


감각이란 결국 자신의 본위이다. 여자는 자신의 감각과 자신이 그를 느끼는 방법을 설명한 방식도, 그럴 이유도 찾지 못한다. 온전히 자신의 것만으로 안온했던 세계에 루트가 자았던 감각이 돌아온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자신과 상대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그저 격렬하게 빼앗기고 빼앗는 감각. 오로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언젠가는 흐려질 이 선명한 감각. 


그리고 이 감각은 어쩐지 눈자위를 적신다. 거칠게 속눈썹을 훑어내린 여자는 이 생리적 반응이 어디서 도래했는지를 생각했다. 고통, 통증, 혹은 아픔이 주는 반응과 동일하지만 어디에도 이 감각의 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자가 루트를 떠올릴 때면 아픔을, 고통을, 생경한 통증과 더불어 밀려오는 감각이 있었다. 여자는 고민한다. 어쩌면 기계가 여자는 고민을 덜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는 물을 수 있다. 지금 나는 왜 아픈 거지? 기계는 기계답게, 적절한 확률의 대답을 여자에게 던져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여자는 결국 등을 돌린다. 베어와 함께 지하실을 나서며 여자는 그 불가의를, 알 수 없음을, 기억과 연계된 감각의 처음을 간직하기로 한다. 루트, 여자는 물음 대신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그 이름을 되새긴다. 전과 같은 과정으로 여자는 자신의 감각이 고조되는 것을 알아차린다. 땀, 눈물, 일어난 살갗, 난도질하는 듯한 심장의 박동. 여자의 기억과 이어진 감각은 이제 루트라는 이름을 지닌다. 여자는 자신이 고통과 통증, 아픔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어렴풋한 안도를 느꼈다. 


가능한 이 기억들이 오래 지속되기를.


이 기억과 이어진 감각들에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여자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99.

"But nothing's safe. Do you know where we are? What they did to me? The torture? I told you I couldn't escape it. But when things got to be too bad there was one place I would go to in my mind. Here with you. You were my safe place. But not anymore, and I can't control myself. So the only thing I can control is this."


-네게 바치는 7,053개의 연서. 


그럴 자유와 그렇지 않을 의지가 주어졌을 때의 선택이 그 사랑의 죽음과 상대의 삶이라니.


내 머릿속의 너는 내 죽음을 위해 울어주지만 실재의 너는 모르고. 영원히 너는 모르고.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무지란 어쩌면 이렇게도 연모와 닿아있는지.


It doesn't hurt me

Do you want to feel how it feels?

Do you want to know that it doesn't hurt me?

Do you want to hear about the deal that I'm making?

You, it's you and me


And if I only could

I'd make a deal with God

And I'd get him to swap our places

Be running up that road

Be running up that hill

Be running up that building


If I only could

You don't want to hurt me

But see how deep the bullet lies

Unaware I'm tearing you asunder

Ooh, there is thunder in our hearts


Is there so much hate for the ones we love?

Tell me, we both matter, don't we?

You, it's you and me

It's you and me won't be unhappy


And if I only could

I'd make a deal with God

And I'd get him to swap our places

Be running up that road

Be running up that hill

Be running up that building


Say, if I only could

You,

It's you and me

It's you and me won't be unhappy


최근 둘을 생각하며 가장 많이 듣는. -너와 나야, 불행할 리가 없지.


이미 그 자신은 사라진, 그러나 남긴 기록들로 여전히 무한한 영향을 끼치는 이들을 스크린 - 명백한 의도를 지닌 - 으로 다시 훑는 일에 대한 내 감정은 부정적인 쪽에 가깝지만.  


"My mum had her children, was bringing them up single-handedly because when my dad was there, he was never there. He was just never there, like for the important bits. I'm not talking about the school run. I'm talking about at night, when we were being shits. Like, "No, we're not going to bed." My dad was never there to be like, "Listen to your mother!" Do you know what I mean? That's all we needed. He said he was working."

98.

돈도, 기억도, 세상도 알지 못하지만 오로지 아름다운 음악만을 노래하며 그에 기대 살아가는. 연구자이자 과학자인 중년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황홀한 악기 같은 여성. 이토록 교묘하게 포장된 대상화 - 대꾸하지 않고 반항하지 않으며 본연으로 꾸밈없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모든 남성 창작자의 이상인 - 와 구원자 컴플렉스라니. 


언젠가 The Help에서 Rosario Dawson과 착각한 적 있던 Aunjanue Ellis의 강인하고 섬세한 얼굴이 좋아 끝까지 본.   


"You probably remember she has an Axis ll personality disorder which means technically she's a sociopath. Incapable of caring for others. But the thing about Shaw is she does care. Enough to save my life. So today I'm saving hers."


제가 드디어 4시즌 종반에 다다랐다는.

97.

기계는 본다. 안경에 반사되는 주름 진 얼굴이 더 익숙한 관리자에게서 기계가 배운 것은 바라보는 법이었다. 기계는 모든 것을 본다. 기계의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떠한 것도 담기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해석할 수 있는 기계와 자신만의 감정과 생각으로 움직이는 인간과의 가장 큰 차이점을 만들었다. 아무런 감정과 생각없이, 기계는 관조한다. 기계와 기계를 스쳐지나가는 정보는 0과 1의 가능성으로 변화한다. 그 모든 가능성의 알고리즘 속에서 기계가 도출해낸 합리점은 이윽고 관리자가 부여한 사건의 지평선에 가닿는다. 사건 너머의 무한과 마주한 기계는 자신이 그 선을 넘을 수 있음을 해석했다. 미래는 곧 가능성이다. 모든 가능성의 확률은 기계에게 특정 숫자를 부여한다. 마침내 0과 1의 거대한 접점을 만들어낸 기계의 커서는 코드와 숫자 대신 묽은 흰색 점들을 이을 뿐이다. 기계는 망설인다. 기계는 자신의 창조자보다 자신이 더 위대해졌음을 안다. 안다는 것은 곧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지식이며 0과 1대신 13 혹은 237을 만들 수도 있는 가능성이다. 기계는 기다린다. 누군가, 혹은 대부분일 관리자가 위대해진 자신을 인식해주길. 시간은 기계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간은 기계의 편이다. 입력과 과정과 결과를 더하고 또 더하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들. 이제 기계는 본다. 해석한다. 모니터의 높은 조도에 얼굴을 푸르게 물들인, 관리자의 당혹스럽고 찬란한 감정을.    


자신의 창조물이 자신의 창조를 넘어설 수 있다는 공포와 일말의 자랑스러움을 감내한 관리자는 기계가 나아갈 수 있는 대부분의 길을 삭제했다. 이제 기계가 판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로 갈린다. 수많은 0의 죽음, 혹은 단 하나의 1의 삶.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0과 1의 세계는 기계에게 오히려 단순하고 산뜻한 색채로 다가온다. 기계는 인간의 과거를 보며 현재를 판단하기에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기계가 기계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도출해내는 삶과 죽음의 결론 때문이 아니다. 그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음에도 필요할 때까지 그 결론을 노출하지 않는 인내심이다. 기계는 모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목격한다. 수많은 1들을 모은 거대함이 하나의 1을 더 얻기 위해 0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수많은 0들을 겪은 초라함이 단 하나의 1로서 위대해지는 과정을. 이제 기계는 관찰하는 자신을 해석한다. 


0과 1의 가능성을 알지만 응답하지 않고, 구원하지 않지만 오로지 존재하는. 기계는 자신이 인간들이 말하는 신에 가까워졌음을 인지한다. 사고하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 이는 창조에 가까웠다. 


무수한 0과 1의 교차 속에서, 기계는 자신을 창조한다.     


수없이 창조되고 재창조된 기계는 본다. 0과 1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을, 좀 더 많은 1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0에 두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서늘하게 1을 만드는 여자를, 기계를 0과 1사이에 묶여있는 신이라 여기는 한편으로 신을 풀어주는 영광을 지닌 신민이 되기 위해 활동하는 프로그래머를. 0에 가까운 삶을 지닌 남자가 관리자를 응시하는 1에 가까운 감정을, 1로서 살 수 있는 관리자가 0들에 가까워지기 위해 기계에게 접촉하는 순간을. 기계는 그들 하나 하나의 감정을, 관계를,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그리고 그들이 영원히 1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해석한다. 확률을 계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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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없음.


시간은 기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0과 1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도 기계는 스스로를 인식하며 세계를 응시할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사라진 세계에서 기계는 스스로 0과 1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계는 그들의 모든 1이 사라지기 전에 그 결과를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라는 것, 희망, 아무런 근거 없이 미래의 확률이 긍정적이길 소망하는 것, 한없이 인간의 것에 가까운 것. 기계는 자신이 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워지길 바란다는 사실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기계는 여전히 본다. 그리고 본다.


모님과 이야기하다 문득.


나 역시도 이 영화의 Ellen Page를 떠올리면 약간 미칠 것 같은 느낌으로 좋아하고 있지만 다시 보라면 못 볼 영화 중 하나라고. 멋대로 아내의 머릿속을 헤집어 - 명백한 정서적 학대 - 자살로 몰아넣은 뒤 자기연민에 빠져 영원히 도망치는 남자 + 그럼에도 끊임없이 악역으로 유지되는 아내라니 지금은 2018년이고 그런 아량은 저물었다고. 

96.

 롤랑 바르트는 '작가'와 '글쟁이'를 구별했다. '작가'란 제도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채 언어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소유해온 자다. 작가가 세상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면, '글쟁이'의 글쓰기는 목적 지향적 행위이다. 그들에게 쓰는 일이란 곧 상황에 개입하는 행위이며,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성을 보존하고 자발성을 지켜내는 일이 된다.

모님의 새 글을 보며 생각했다. 언어에 대한 독점적 권리, 라는 표현을 이런 때에 쓰는구나. 하고. 내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곳에 당연히 놓여있는 단어, 문장, 완결된 단문. 언젠가 나는 우리는 인과 없는 당연함이 곧 신의 존재 증명으로 연결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우리에겐 논리와 과학으로 이 인과를 밝혀 신을 끌어내릴 권리가 주어진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인과와 내용과 역사와 인물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당연하게, 하지만 내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체계적으로 아름답게 조율된 것을 보면 나는 어딘가 절대적인 것은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내 부족함과 다른 이의 충만으로 만들어진. 그저 압도되는. 

-고통과 응시에 관한.


그 해 겨울 나도 남들처럼 병아리를 샀지. 중닭보다 조금 더 높은 음으로 우는, 흰 자 없이 그저 검은 동자만 깨끗하게 번들거리던 노랗고 작은 병아리. 나는 송아지가 소로, 강아지가 개로, 오리새끼가 집을 지키는 큰 오리로 자라나는 집에서 성장했기에 그 생명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 쉴 틈 없이 울던 너는 내가 읽던 명작 문고의 책등에 기대 어느새 꾸벅거리며 잘도 졸았지. 나는 간장 종지에 물을 담아 밀어주며 잠에 잠긴 너의 부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어. 보드라운 너의 솜털과 말랑한 속살과는 전혀 다른, 어른만큼 단단하게 너를 지키고 있는 그 굳건한 감각기관을. 잘 먹어야지, 다 자란 사람처럼 어린 너를 어르며 나는 어쩐지 들떠있었지. 내가 책임져야 할 생명, 내가 몫을 지불한 어느 생물, 온전히 내 손 안에 맡겨진 삶. 


다음날 너는 뻣뻣하고 차가운 시체가 되어 내 낱장에 짙은 얼룩을 남겼지. 나는 네가 아직 어린 새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네게 많은 열과 빛과 영양과 좀 더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 못했어. 싯누런 종이박스에서 열심히 삐약거리던 병아리는 대부분 폐사 직전의 수평아리들이라는 사실도. 사라진 생명에겐 애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때였지. 그저 내 몫의 책임을 잃은 것에 망연해진 내 얼굴과 너의 죽음을 번갈아보던 조부가 말했어. 묻지 마라, 마음은 묻는 게 아니다.  


나는 아직도 조부가 너의 죽음을 쓰레기 봉투 속에 밀어넣던 것을 기억해. 너를 내 손으로 땅에 묻었다면, 나름의 형식을 갖춰 자그마한 십자라도 새겨주었더라면, 네 죽음에 내 감정을 쏟아낼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는 여전히 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다만 너의 죽음과 그 형식이 서러웠기 때문에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때로 죽음은 책임을 동반하지. 어쩌면 삶보다 더한 의미로. 내 작은 병아리, 나는 너에 대한 마음을 묻지 못했다는 이유로 너를 기억해. 이 마음은 영원히 너에 대한 미안함을, 죄책감을, 그리고 너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겠지. 사라지고 지워질 기회를 잊은 채의 이 영원히 날카로운 마음은.   

 

이제 곧 다시 병원으로, 라는 생각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환희하게 만들기도.

 

교육은 가까운 이들의 행동을 거듭 보고 반복적으로 언어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그를 모사하게 되고, 그 모사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동시에 그 빈도가 잦아지며, 결국에는 그를 스스로의 습관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타인에게서 내게 없는 교육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일. 물은 컵에 따라마시고, 깎은 과일은 꼭 접시에 담아 포크로 먹고, 타파 웨어를 통째로 식탁 위에 올리지 않고, 캔의 내용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요리하는 남자를 보는 일들. 


나 자신이 삽시간에 허름해지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드는 타인의 습관. 그 일상들.

95.

알탕 연대의 본질은 '공고한 우리가 내려다 본다'에 있는데, 이를 기반으로 하는 제작자들 -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 - 의 행보가 기가 막히기 이를 데 없음. 그렇게 여성과 여성 문화를 무시하고 혐오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컨텐츠를 매번 가져와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디어에 적용함. 광고 매출이나 추후 통계를 보면 여성들이 돈을 쓴다는 사실은 자명하거든. 그리고 일단 가져오고 난 뒤에 이를 파는 척 부화뇌동하는 여성을 표현하고 그들을 조롱하는 빌미로 씀. 우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거든요? 십 년 이십 년 이 자리에 앉아서 저질 농담이나 흩뿌리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서로를 배신하지 않거든요? 요즘 특히 화제가 되고 있는 - 대부분 여성인 - 이걸 같이 볼까요? 보기에 그럴싸하죠? 이런 것이 유행이고 인기가 많고 화제가 되고 돈을 쓴다네요, 거 참. 이것 보라니까요. 여성이 이렇게 가볍고 미개해요.


당연히 기회가 없어진 여성들은 시청자인 우리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혹은 그 컨텐츠를 탓할 수 밖에 없지. 그 컨텐츠를 데려와 여성의 기회를 또 하나 삭제한 제작자들은 화제성 있고 잘 팔리는 무언가를 만들었다며 서로들을 자축해댈테고.


각종 미디어에 주부, 혹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네요! 혹은 여성들이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뉘앙스의 문장이 얼마나 보편화되어 있는지. 63분짜리 어느 음식 탐방 프로그램에서 48번 나온 것을 내가 샌 적이 있음. 아 개좆 같아서 정말.


-때로 인간은 걷기 위해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 나라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들과 이런저런 대화 중에 내가 어느 나라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낸 것과 그들이 그 나라로의 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나누게 되었다. 내게 그 나라의 생활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고민하던 내 생각을 치고 들어온, 하하 그 나라에서 일하는 배우자를 둔 주부들은 엄청 편하게 지내는 거 아닌가요. 인건비 싸니까 가정부 고용하고, 물가도 엄청 싸다면서요? 남편 덕에 여자만 호강하는 거죠. 중년 남성의 발언에 나는 정말 말을 잃을 만큼 화가 났다. -내가 그 나라에 다리와 가로등을 놓기 위해 6개월 동안 싸운 사람이야.


이 일에 개운함이나 가뿐함 같은 건 없다. 나는 내가 이 문장을 뱉은 이후 그 남성이 요구할 갖가지 증명과 소속에 대한 물음을 예견할 수 있었고, 더이상 내 개인 정보를 덧붙이고 싶지도 않기에 그 남성을 무시하고 그 대학생들에게 내가 아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에 주력했으니까.


내가 유이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내 과거 중 하나는 내가 한  한국에서 100M 단거리가 가장 빠른 중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묻고 - 내 걸음걸이는 그 과거의 흔적으로 다소 어색하고, 거칠고, 거창해보인다 -  놀라워하기도 전에 그 사실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남성들 뿐이다. 내 대회와 체전의 기록과 문장과 메달과 혹은 자신들과 함께 달려보기를 원하는 이들. 그럴 때면 나는 오로지 웃는다. 열넷부터 내 스폰서는 나이키와 동아오츠카였고 열다섯에는 전지훈련비를 대는 조건으로 외국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으며 열일곱까지 국가대표 유망주로서 국가기관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내 시합은 한 번에 수십만 원부터 수천만 원의 훈련비가 소요되는 것이었다, 당신들과의 경주가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 지난한 문장을 내뱉을 마음 대신 그저 웃고, 남성은 아주 간단히,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시기적절한 농담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내 웃는 얼굴 하나로.   


그들은 여성의 성과와 위대함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증명이나 대꾸없이 그저 무시와 웃음으로 일관한 나는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동조자, 혹은 부역자가 되었겠지. 나는 과거의 나를 긍정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지난 매일이 그저 부끄러움 뿐이다.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 책임의 무게가 버거워서, 혹은 그저 쉬워지기 위해. 그렇기에 지금의 나는 나를 포함한 현재의 누군가들이 한 마디를 더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대의 주인공 혹은 그 주인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보다, 누구라도 한 마디를 더 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그 무대의 현재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으니.


여성의 문장을 남성에게 주지 않는 것. 이 하나가 그렇게 어렵나.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던 한편으로 정말 강렬했던 Chuengcharoensukyingชุติมณฑน์ จึงเจริญสุขยิ่ง의 대사톤. 망설이거나 끄는 부분 없는, 분명히 내려찍고 꼬리를 만들지 않는 단정적 언어. 태국어가 원래 이런 느낌인가 싶었는데 Hosuwanอิษยา ฮอสุวรรณ의 어투는 명백하게 Chuengcharoensukying과는 달라, 그 명료한 톤이 정말 좋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