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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혼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해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모임의 나는 내가 선택한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내 해석이 가미된 영어로, 일본어로, 그리고 다시 원문의 한글로 읽는다. 모임에 놓여진 각종 국적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언어로 된 문장의 의미만을 받아들인다. 영어를 아는 이들은 선명한 묘사의 인상적임을, 일본어에 익숙한 이들은 단어의 리듬과 운율과 마치 시처럼 아름답게 갈무리되는 문장들을, 한글을 아는 오로지 나는 내가 아는 도시와 이미 먼 서울과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린다. 구름을 더듬는 듯한 묘사가 주는 그 기묘한 허망함,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재정립되는 글의 이미지를.
언어의 힘은 기실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아는 사람이 그 힘을 해석한다.
원래도 좋았지만 근간 너무 좋아진.
나는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악세사리 노릇을 하는 것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도, 합당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그 상황을 재미있게 여기는 편이라 특정 몇몇의 취향을 맞추는 일에 능숙하다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다. 무슨 주제가 나오든 대화할 수 있는 저변을 익히는 과정 또한 흥미롭고. 곁가지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고, 기록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이 모든 일들을 생업으로 삼을 만큼 좋아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까운 누군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감당하는 일은 여전히 버겁고 혼곤하다.
나는 언제나 가장 먼저 사라질 사람이니, 당신이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특정 이슈의 리트윗은 FB에서 회자되었던 효도, 댓글과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직접 일어나 행동하기엔 귀찮고, 더 많은 시간이나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그럴 만큼 마음이 가지 않는. 정말 아주 간단한 즉석의 짧고 작은 동의, 혹은 미미한 나의 성의.
-그렇군요. RIP.
탐라에서 이야기가 나와서 문득. 인물의 입체성 + T의 서술적 장치를 위한 것이 눈에 보였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고통 받았던 동창의 고통을 너무나 간단하게 도구화한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대사를 잘 쓰는 작가 답게 "You want other people to do the things you can't so you can blame them." 등지의 문장은 무척 좋았지만.
감독 겸 조연이었던 자신의 전작 여성 배우를 데려와 주인공인 배우 겸 감독과 미묘한 관계를 잣는 - 자신이 만든 음식을 섹시하게 음미하는 - 여성 역할을 맡긴 남성 감독의 욕망이 너무나 투명하여 정말 큰 웃음이었던.
남성 감독과 여성 배우의 권력 관계는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근대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들 감독은 또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핑계로 이 권력을 포기할 생각을 1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 제작자들이 더 많은 비율의 여성 감독, 배우, 스텝, 시나리오 작가를 불러오는 수 밖에 없음.
나는 영화 외적인 인터뷰 혹은 홍보 영상 등지에 정말 관심이 없는 편인데 - 언젠가부터 쿠키도 안 보기 시작함. 굳이 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본작에서 - 이런 내게도 완전히 새로운 영화는 없구나, 싶은 생각이. 어떤 경로로든 배우와 감독과 원작 혹은 시나리오의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 영화는 보고싶다 혹은 이 영화는 봐야겠군, 이라는 마음을 먹게 되는 과정 상에 어떤 것들이 내게 가장 큰 채널로 작용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음. 그 정보들을 어떤 방식으로 취사선택할 것인가까지도.
언젠가 전혜린? 의 수필에서 모국의 남성들은 절대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는다, 라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최근의 생각으로는 모국의 남성은 무언가를 묻고 상대방의 답변을 받아들인다, 는 행위 자체가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지위의 공고함을 깎아먹는다고, 소위 지는 것이라 여기는 듯함. 너 나를 좋아하니? 너 오늘 밤을 나랑 보낼 생각이 있니? 너 내가 마음에 안 드니? 이러한 질문과 돌아오는 상대방의 답변을 감내하지 못해 어떻게든 지레짐작으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혹은 무시하며, 멋대로 일을 저지른 뒤 결국은 네 행동이, 말투가, 네 모든 것이 내게 이런 식으로 작용했다. 라 책임을 떠넘김.
물어보는 용기와 받아들이는 책임 없이, 그저 자신에게 긍정적인 결괏값만 한껏 누리고자 하는.
-먼 곳이었기에, 그저 큰 빚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라는 서두를 생각하다 문단을 접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놓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의 글 하나를 불러와 봅니다.
딱히 무언가를 분류하거나 경계를 짓고 싶지도, 그 주체와 행동하는 방식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음. 아무나, 하고 싶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럼에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됨. 따르고 싶으면 따르고,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또 저마다의 방식을 찾으면 됨. 이 과정에서 존중되어야 할 오로지 한 가지는 앞서 나간 족적을 폄훼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함.
이런저런 소개와 계기로 여성들의 대화, 라는 지역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정확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화가도 시나리오 작가도 음향 감독도 일러스트레이터도 학생도 변호사도 안무가도 점원도 수의사도 봉사활동가도 있는 이 곳에서의 내 포지션은 다른 문화의 배우자를 둔 이방인.
정말 많은 이야기를, 생각을, 삶의 방식을 훑으며 이렇게 시간과 기록은 역사를, 연대를 이룩하는 구나, 하고.
언젠가 여유와 허가가 생기면 그 녹취들을 타이핑할 생각도.
[주인공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이틀이라는 게 신경 쓰여요. 인간의 시계에 자기 스케줄을 맞추어 주는 친절한 전염병. 그래요. 우린 같은 행성을 공유하고 있죠.] -이 네 문장의 매혹이.
너무나 격렬하게 그 음악과 이 사람을 사랑했지. 신이 이런 모습이라면 정말 기쁠 것이라 여길 만큼.
This will be my last confession
"I love you" never felt like any blessing
Whispering like it's a secret
Only to condemn the one who hears it
With a heavy heart
Heavy, heavy, I'm so heavy in your arms
I was a heavy heart to carry
My beloved was weighed down
My arms around his neck
My fingers laced to crown
"You can have a lover at 60. You don’t have to be shoved in a corner in a cardigan doing knitting. -That’s because film and television-makers realise that there is a huge audience of women who want to go to the cinema or turn on the telly and see stuff that doesn’t alienate them, that embraces them, that isn’t just about gorgeous 20- or 30-somethings, that represents their lives.”
자신의 예민함을 숨기지 않는 배우는 정말이지 좋지.
지지난주인가 지인의 지인이 마케팅 담당했다고 D2 시사 티켓 주길래 보러갔다 그 관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짜증과 혐오와 내가 여기 왜 있지? 라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그냥 나옴. 영화 보다 나온 건 Irreversible, 이후 두 번째인 듯. 추후 왜 나한테 티켓 줬냐고 물어보니 너도 즐길 수 있을 만큼 재미있고 잘 빠진 중립 영화, 라는 답변이 돌아와 어이가 없었음.
그들이 원하는 동양인 여성이란 누군가의 여자친구, 로만 존재하는 어려보이고 예쁘고 잘 꾸미고 잘 웃으며 한정된 어휘로만 커뮤니케이션 하는 - 굳이 깊은 대화를 바라지 않는 - 팔랑팔랑한, 그야말로 한 종류의 케릭터이고.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는.
그리고 또 여성은 충격적으로! 죽고.
-How nations suffer for the sins of their fathers.
영화 정말 심란하게 거지같다고 생각했지만 오로지 Kristin Scott Thomas의 고아함이 좋았던.
굉장히 좋아하는 얼굴들이 연이어 떠올라 문득.
I want you flat on your back. Helpless, tender, open with only me to help. And then I want you strong again. You're not going to die. You might wish you're going to die, but you're not going to. You need to settle down a little.
당신은 날 위해 눕고, 아프고, 그 고통으로 날 사랑하고. 그리고 아프지 않는 나날에는 나를 혐오하며 당신의 재능을 경연하고.
-약해 보일 때만 네가 내 것 같아, 은희경이 이런 표현을 썼었지.
구걸하는 것이라 여겨졌던 비루한 사랑이 결국에는 권력이 되고, 싸움이 되고. 찬란한 경연이 되는. 눈앞을 휘황하게 하는 드레스보다 훨씬 강렬했던 사랑하는, 사랑받는, 결국에는 그 마음의 우위를 거머쥔 Alma의 얼굴, 그 표정.
Would you like me to ask Alma to leave?
No, why?
Well, if you're going to make her a ghost, go ahead and do it, but please don't let her sit around waiting for you. I'm very fond of her.
Oh, you're very fond of her, are you? Well, in that case...
Well, don't turn it on me. I don't want your cloud on my head.
-Oh, shut up, Cyril.
-Oh, you can shut right up. Don't pick a fight with me. You certainly won't come out alive. I'll go right through you and it'd be you who ends up on the floor. Understood?
남성의 뻔한 조력자인가 싶었던 순간에 가장 팽팽히 당겨진 실로 존재하던 Cyril 또한.
Last night I dreamt I went to Manderley again... I came upon it suddenly; the approach masked by the unnatural growth of a vast shrub that spread in all directions... There was Manderley, our Manderley, secretive and silent as it had always been, the gray stone shining in the moonlight of my dream, the mullioned windows reflecting the green lawns and terrace. Time could not wreck the perfect symmetry of those walls, nor the site itself, a jewel in the hollow of a hand.
Rebecca 다시 읽어야지;_;
언제나 꿈 꾸는 자의 얼굴.
일상적 언어에는 수많은 완곡어법, 인사의 말투, 넌지시 하는 말투, 암시법, 약정적인 표현법이 있다. 말투가 솔직하고 자연스럽고 표현적이기를 우리가 요구할 경우, 우리는 어떤 살롱에서 통하고 있는 세세한 점들을 버리는 것이며 대상들을 바로 그 대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칭은 새로운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바로 그 말이야'라고 말한다. 우리가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 이름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되자 마자, 우리가 표현이 강한 명칭을 얻고자 할 경우에는 거꾸로 은유, 암시, 비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대상을 더욱 민감하게, 보다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알게 할 수 있는 적확한 말을 찾게 해줄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습관화되지 않은 어떤 말,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약속을 어긴 어떤 말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예기치 않은 말은 표상적 명칭이며 동시에 고유의 명칭인 것이다.
-이 문단을 읽다, 수많은 별명과 단 하나의 본명을 생각해본다. 인지된 존재로부터 파생된 갖가지 기억, 명사, 비유. 보다 간접적으로 달리 표현되지만 결국 본질은 단 하나의 너, 당신의 이름, 내 안의 존재, 그리고 내부에서의 외부의 부름.
인간이 하나의 다른 타인을 자신의 인지 너머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는 응답 없는 신조차 우리의 것으로 해석해버렸는데.
어쩌면 인류가 남긴 모든 기록의 의미는 자신을 넘어선 지평 너머의 객관화에 대한 열망일지도.
그리하여 모든 먼 존재는 내려다 볼 수 있는 하늘에, 우리는 여기 지평에 발을 딛고 맞선 사람의 눈을 직시하며.
-Kiss me, my girl, before I'm sick.
영화는 인물들을 빌어 Columbus라는 공간을 환희하는 것으로 쉽게 착각되어짐에도, 기실 Columbus를 통해 인물들을 이야기하는 것에 더 많은 힘을 두고 있습니다. 선명한 소실점과 수직과 수평의 선들이 가득한 건물과 거리를 거닐며 인물들은 때로는 지나치게 작게, 혹은 좁게- 때로는 소리없는 세계의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우리는 이 작은 정보들 틈에서도 N을 지닌 Jin이 왜 Columbus를 찾아왔는지, Casey라 불리우는 Cassandra가 왜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회상 장면도 불러오지 않고, 굳이 소리에 많은 입체감을 불어넣지 않으며, 카메라의 동선마저 제한한 듯한 - 두 주인공이 산책로를 걸을 때 무릎에서 잘리는 그 애매한 앵글감하며 - 차분하고 정적인 영화의 흐름과는 달리, 대디 이슈에 시달리며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와 재활 중인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못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꿈을 간직한 여자의 내면은 자신들만의 것으로 격렬하고, 또 위태롭습니다.
그럼에 이 두 사람은 아름다운 건축과 풍요로운 환경을 이야기하며 조금씩 서로를 털어놓게 되고, 설명하지 않는 것을 굳이 알려 하지 않으며 - 여자는 어머니의 문제를 묻는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남자는 아버지의 상태를 묻는 여자의 의문에 답하지 않는 - 오로지 현재만을 비춰주던 Columbus에서 각자의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자신이 왜 이 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던 남자는 종국에는 그 곳에 남기로 하며, 끝까지 이 곳에 남으려 결심했던 여자는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건축, 그리고 자신만의 꿈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영화 상에서 변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Columbus라는 공간과 건축과 아름다움은 여전하고, 아버지의 문제는 아버지의 문제로, 어머니의 문제는 어머니의 문제로 그대로 남겨집니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이에서 비롯됩니다. 어떠한 드라마틱이나 격정적 충돌 없이, 다만 이 섬세한 연출과 간접적 훑음으로 변화됨을 암시하는.
여전한 공간의 충실함과 내면의 변화가 하나가 되어, 아름답게도 유지되는.
공간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Lost in Translation과 Lady Bird가 함께 생각나기도 했는데. 전자가 문화적 상대성에 대한 비웃음과 성적인 긴장감이라는 면에서 저를 실망시켰고, 후자가 위악이라는 면면에서 저를 약간 허탈하게 만들었다면 있는 그대로의 변화와 공간, 꿈과 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한 이 영화에 저는 온 몸으로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올해의 영화입니다.
"브로냐 언니. 나는 멍청했고, 지금도 멍청하고, 앞으로도 계속 멍청할 거야. 아니면 지금의 생활에 젖어버린 것인지도. 나는 과거에도 운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운이 없을 거야. 나는 파리가 마치 구원의 장소인 것마냥 생각했지만, 파리에 가겠다는 희망은 오래 전에 사라졌어. 이제 그 가능성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버지께 이 말을 하는 것도 두려워. 물론 내년에 파리로 가서 언니와 같이 지내겠다고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기뻐하실 테고 또 분명히 격려해주시겠지. 하지만 나는 나이 드신 아버지께 자그마한 행복이라도 선사해드리고 싶어. 한편으로는 내가 지닌 재능을 묻어버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내 재능도 어딘가에 쓸 만한 것일 텐데."
-문득 퀴리 평전의 아직 어린 마냐가 브로냐에 보낸 이 서신이 떠오르기도.
“When I hear that Cookie is a bad representation of black women, I don’t get involved. Maybe Cookie makes you uncomfortable because she reminds you of yourself. People miss the bigger picture when they start judging.”
거대한 목적이 있는 행위는 자주 내가 서 있는 곳을 잊게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해하지 않는다, 가 지켜준다로 왜곡되는.
어느 쪽이든 편한 쪽에 기대고 싶은 스스로의 치졸함을 알기에 올해 내 목표는 공정함. 나는 언제나 어른이라는 것이 뭔가 거대한 것들로 이루어진 완성된 존재라 여겨왔는데, 사실 어른이란 언제 어디서든 지켜야하는 것들이 있을 때 적극적인 자세와 큰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가고 있다.
법이 정해준 최소한의 테두리에서 최대한의 윤리로 그를 지키려 노력하며.
벼룩시장에서 퍼오인 박스셋을 10달러에 건져 배경 음악처럼 틀어놓고 있는데, 다시 봐도 존 리스의 연기는 참으로 할 말이ㄱ- 그럼에도 카터:_;, 핀치와 잉그램;_;, 윌, 루트;_;, 쇼;_;와 베어의 관계가 좋아 오며 가며 들여다보고 있다.
제가 스포일러에 시큰둥한 이유는 또한 많은 감독들이 취하곤 하는 이건 모르겠지? 내려다보는 시선의 불쾌함도 한 몫 하겠죠. 대부분의 감독과 제작사가 바라는 바겠지만, 관객은 그들의 생각만큼 멍청하거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해당 작품의 전개가 대단하다면 그 작품을 맡은 팀, 즉 원작자, 각본가, 윤색가, 제작사, 제작자, 감독, 스텝, 배우, 홍보사의 힘이 모두 합쳐진 결과일 겁니다. 언젠가 Ragnarok의 애드립들을 두고 한 번 스쳐지나가는 스텝들보다 이 케릭터를 지속적으로 연기한 배우들의 훌륭함에 대한 트윗이 도는 것을 보며 꽤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는데. 좋은 배우들이 풍부한 자양을 제공한 것은 맞지만, 그러한 연기들을 걸러 용납할 만한 케릭터를 만들고 작품에 걸맞는 감정선을 잇는 것은 편집 및 후반 작업을 담당한 프로덕션과 제작사, 그리고 해당 스텝들이지, 현장에서의 연기를 이미 마무리한 배우들이 아닙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만 그에 얽힌 수많은 자본과 계약과 연결된 관계자들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한 작품의 기민함으로 그 감독의 모든 것을 찬양할 수 없는 이유도 이와 동일하겠지요, 특히나 마블 + 디즈니과 같이 거대함으로 자리한 대형 스튜디오의 경우에는요.
지난해 헐리우드의 영화 산업에 몸 담은 여성의 비율은 8%가 감독이며 10%가 시나리오 작가, 2%가 촬영감독이며 24%가 제작자, 14%가 편집감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흥행순위 100위권에 속하는 영화들 중 여성 종사자의 비율은 총 3%이며, 2016년의 4%에 비해 오히려 줄어든 추세입니다. 적은 비율이나마 여성제작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 캐스팅 디렉터는 이미 60% 이상이 여성이라는 통계 또한 -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남성이 차지한 자본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여성제작자가 명예 남성화되어 있지 않기란 정말 힘든 일이며, 여전히 빻은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 영향력에 대해 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선시 되는 것은 돈이며, 돈이고, 또 돈입니다. 제가 언제나 여성제작자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 또한 이와 동일합니다. 여성의 성공과 실패가 집단이 아닌 개인의 것으로 치부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비율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체에서 차지한 비율이 늘어날 때, 우리는 일부 특정 집단이 아닌 개개인으로서의 존중을 받습니다. 고르고 고용하고 과정을, 그리고 결과를 만들고 성공이든 실패든 이에 따른 몫들을 감당하고 나눠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동료와 아군과 혹 적군일지라도 저 사람도 있으니까, 의 일례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남성들이 해왔던 그 많은 실패의 변명과 성공의 공치사들처럼요.
-이것도 경향이다만 나는 대사에 힘을 주는 편인데다 시나리오 상의 감정선을 중시해서 애드립하는 배우들 정말 불편해했던 기억이. 내 깜냥에는 편집점을 잡는 것도 어려웠고.
보고 나서 이야기하는 거야 뭐. 이런 관점도 있구나, 하고.
Sontag과 Highsmith가 거론하는 Arbus는 의도가 되어버린 취향과 의도를 지닌 취향의 경계가 모호한 사람이라 조금 깊게 들여다보고 싶어 영화를 찾았는데. 어떻게든 취향은 곧 성애이며 성행위는 정상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치는 감독의 의지만이 만연할 뿐 Arbus 개인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어 상당한 실망을.
이 좋은 배우들을 이렇게밖에 쓰지 못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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