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오래되어 색까지 변한 여름용 실크 치파오 한 벌을 받았고. 날캉날캉한 결을 조심히 만지며 닳을 때까지 열심히 입어야지, 생각했다.

외모가 권력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은 조부의 부재 이후. 그 누구도 조부 아래 내게 크다 작다 말랐다 쪘다 어딘가 이상하다 뭔갈 닮았다 이야기한적 없으며 조부도 그러했기에 나는 정말 내 외양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며 겨우 세수나 매일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조부의 죽음 이후 주변인이 내게 던졌던 그 평 아닌 평들이란.

운동을 해서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밤을 새워 말할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장점은 내 몸이 지닌 공간과 한계를 알기에 몇 킬로의 몸무게나 찌고 마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일까.

덕용 사이트를 따로 파다 보니 이 블로그는 정말 뻘소리의 향연이 되었으며.

남의 작업에 제목 짓는 것을 잘해 꽤 의뢰를 받았고 지금도 약간의 자부심으로 기억하는 몇몇 제목들이 있음.

소설은 그럭저럭으로 읽었으나 이렇게 재미없게 각색을;_;

Thanh Nguyen의 글은 에세이가 조금 더 취향으로 Nothing Ever Dies에서 - 실비아 플라스의 낭비없는 밤들,이 떠오르는 제목 - 에서 작가는 한국의 전쟁기념관을 방문 후 식민 지배를 당한 민족이 학살자로서의 과거를 자랑스레 전시하는 것에 분노와 괴리감을 느끼고. 또한 고국에 대한 이야기를 고국을 버린 나라의 언어로 표현하는 자신을 끊임없는 자문하며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이라거나 수키김의 통역사를 불러오는데.

그러고보니 H마트에서 울다, 를 읽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지. 디아스포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국의 과거와 연관지어 연대기적으로 작문하는 것은 21세기에 끝난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이제는 모두들 사소설이 되어버린.

대한극장의 마지막을 들으며 향유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도. 그 순간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어딘가 과시할 수 없는 영화는 이미 지난 시간의 매체가 되어버렸고.

그리고 모님이 즐거운 생일을 보내셨길:) 하고 조심히.

406.

히가시무라의 그리고, 또 그리고. 를 읽고 난 다음날이라 더 괴롭고 너무나 좋았던. 무엇도 일어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이어지는 장면 장면과 인간의 감정. 경쟁, 질투, 동경, 죄책감, 그럼에도 포기할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Michelle Williams는 물론이고 느긋하게도 연기하는 Hong Chau가 참 깊었던.

초여름에는 항상 당신을 생각하고.

어느 부분은 옳고 어느 부분은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성인이 되지도 않은 아이들을 대상화하는 산업에 내 언어까지 덧붙일 필요가 있나 싶고. 정말 마음 편히 입을 다물고 싶은.

다 싫고, 포기하고 싶고, 이 월급을 받으며 가치도 없는 일들을 견뎌야하나 생각하다 결국 이 모든 수모와 굴욕이 내 일상을 지탱한다는 사실에 더 괴로워졌다.

요즘 많이 들여다보고 있는.

405.

그러나, 그럼에도.

마치 잃어버린 기억이라도 난 것처럼.

머릿결이 좋은 사람을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가슴이 뛰는건 첫사랑의 영향일까.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해보지 못했던, 귓바퀴를 넘어 스륵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나도 모르게 넘겨주고 쑥스럽게 웃었지. 자꾸만 말라오는 윗 입술을 힘겹게 이로 누르며.

고시원이었나. 신새벽 책장에 깔려 갈비뼈가 부러진 경험이 있는 나는 손 닿는 범위 내 책장이나 떨어질 위험이 있는 선반 등을 놓지 않는데. 문득 발견한 사진에서 그럴 가능성이 높은 뭔가를 발견하면 내가 불안해진다.

다시 눈을 감고, 뜨고. 숨을 쉬기.

적은 금액으로 가장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기억은 꽃. 그 향기와 화사함, 일시일지라도 공간을 달라지게 만드는. 쓰레기 처리의 문제로 지금은 나라에서 관리해주는 꽃만 보지만.

나라고 매번 옳거나 공정할까. 나 자신의 추함과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관심받고자 하는 행동을 알고 자제하려, 정말 간신히.

경제활동은 각자 하고 있다보니 남자의 진로에 대해 특별히 고민한적도 그렇구나 힘네, 정도가 반응의 전부였고 - 석사를 정말 너무 오래해서 박사를 재촉하게 만든 약간의 미안함은 있음 - . 말을 조리있게 하는 편임에도 법정에 가본 일이 거의 없고 그쪽 업계치고는 연봉이 낮으며 별도 자격증을 따야하고 일이 많다, 는 자리를 택한 것에 대한 의문만 잔잔했는데. 얼마 전 일 하나를 도우며 그 궁금증이 풀렸다. 업무마다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조사와 추리가 기반이라 일이 재밌어; 보험조사관과 얼핏 비슷한데 분야가 교묘하고 전문적이라 확실하게 흑백을 가릴 수 있고 더 손댈 일 없이 결과가 깨끗히 마무리됨. 이런 종류도 드물지, 와.

이제 모두들 과거를 회자하는 나이가 되었고.

각각의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많았던 그들의 세계에서 역시나 내 다른 이름은 그, 여대 다니던 애.

카페에 잘 가지 않고 외식도 드물고 당근에서 나눔을 받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가고 KOFA를 가는 내게 그럼 너는 어디에 돈을 쓰니, 하고. 빚을 갚고 공간의 문제로 요즘은 전자책을 많이 사고 이따금 남자를 만나러 가고 얼마전 어느 사이트에서 어느 책의 초판과 오래된 빈티지 가방을 발견해서 바로 샀어요. 세금 나올듯, 이라는 대답에 당신이 웃고.

아휴 하기 싫다, 한숨 뒤 다시 책상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