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절대로 당신께 고백하지 않을 어떤 것들.

수행하는 기획이 있어 서울 시내 대부분의 전시를 다녀왔고 퓨리오사, 청춘 18x2, 악마와의 토크쇼, 챌린저스 등을 보고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을 서른 권쯤 읽었지만 그리 싫지도 좋지도 기억에 남는 것들도 없는 걸 보면 모두들 고만고만했던 모양.

배우가 아름다웠고 보석이 황홀했고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낸 형체가 굉장하네, 라는 감상만.

-다만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지.

네가 없는 이 안전하고 평온한 공간에서
나는 감히 그 공기와 너를 상상하고

딱히 누군가를 따라 무언갈 산 적도 그럴 자본도 시간도 충분치 않아 출처를 밝힘이니 라방이니 손민수니 하는 이야기가 그저 새롭고 신기하고.

아, 책은 자주 찾아 읽었지.

나는 내 무식에 대한 공포가 정말 커서.

내 짐승같은 특기 중 하나. 지면의 경도가 달라짐으로 인한 흙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을 수 있어 오늘 강우 확률을 7할 정도로 맞출 수 있음. 십여 년까지는 9할 이었으나 기후변화로 인해 대기보다는 구름이 비를 내리게 하는 경우가 많아져. 갑작스럽게.

또 다른 특기는 이륜차를 기술이 아닌 힘으로 끌고 다니는 것.

혀에 링을 박았을 때 다른 건 차치하고 끼어들기 한 차를 위협하며 가운데 손가락과 혀를 함께 보였을 때 효과가 좋았던 것이 새삼. 그 땐 어린 객기에 열에 아홉은 헬멧도 안 썼지; 모님이 지금 사지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것이 놀랍다 할 정도로.

춘천은 다녀올 때마다 재미있는 경험을 하는 곳으로 - 인턴 경험으로 짧은 체류 시 러시아도 다녀오고 어느 이하 영하의 대기 속에서는 물을 뿌리자마자 언다, 는 기본 열역학조차 통하지 않는 기억 또한 - 오랜 지인을 만나러가는 길. 김유정역에서부터 전철내를 오가던 어느 중년은 닭갈비 가게를 선전하며 무료 투어까지 있다는 점을 강조해가며 팜플렛을 줬지만 혼자 앉은 나만은 외면했고, 헤매어가며 탄 버스에서는 초등학생에게서 차비를 받은 버스 운전사 분이 주행 내내 초등학생이 돈을 지불해야하는 이 나라의 현실을 개탄했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게 된 최근, 대신 선택한 숯불 닭갈비와 막국수가 정말 놀랄만큼 맛있었고 머리 많이 길었네, 라는 인사에 그러게 잘라야하는데. 대꾸 한 마디에 끌려간 미용실의 삼만 원을 지불한 컷과 펌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드물게 여러 번 거울을 보며 웃었다.

버터크림을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함께 걸어간 오래된 빵집의 버터크림빵도 가방 곁으로 삐쳐나올 만큼 거대한 맘모스빵도, 굳이 시간을 내어준 그 지인의 마음도. 함께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걷는 공지천의 푸른 수목도 국립춘천박물관의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도 입천장이 마를 만큼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언젠가 네가 서울에 온다면의 가정을 이야기하고 싶어졌지. 내가 자주 자전거를 타는 산책로엔 붉은 양귀비가 한창이라고. 너만 허락한다면, 네가 고개만 끄덕여준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긴 산책을 하고 싶다고.

짧게 온 비를 맞다 다시 오래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눈이 아파질만큼 진초록의 나무와 모든 것을 반짝이게 만드는 치열한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부질없고 아마도 부질없으며 그럼에도 부질없으나. 이를 지키기 위해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

409.

십 대에 도미하여 고국에 대한 향수와 일정 이미지만이 남아있는. 마냥 좋다고 이야기하기엔 도식화된 면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자수전에서 볼 수 있어 또 반가웠던.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도덕적으로 우월한 체하는 서방의 도식, 즉 선과 악,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국제적 ‘규칙 기반의 질서‘를 구한다는 도식은 남한과 일본 같은 서방의 충실한 동맹국에는 잘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잔혹한 서방의 식민지 역사를 기억하고 아직까지 그 유산으로 고통받고 있는 남반구의 여러 곳에서 이러한 주장은 맥 빠진 소리로 들릴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여전히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살인마 독재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아왔다. “너희들이 뭔데 국제 규칙을 존중하라고 말하는가?”라는 것이 이들의 관점이다.

모든 전쟁은 다르지만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상황도 떠오르고. 여러가지로 다른 관점을 지녀야 한다 생각했던.

-얼굴, 얼굴.

달리기를 잠깐 하고 다시 미뤄둔 일로 돌아가야 하여 모님과 얼굴만 마주친 자리. 빠른 운동을 위해 세탁 직전의 얼룩진 운동복의 나를 보던 모님의 태극기 같네, 라는 낮은 음성에 내가 아래 위가 맞지 않는 계절의 기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요, 5월은 가정의 달! 겸연쩍은 말을 던지는 내 손에 쥐어진 두릅이며 봄나물 봉투를 챙기다 문득 말했다. 며칠 전 아주 좋아하는 분들을 만나 어느 취향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 분들께 폐가 될까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모님과는 정말 둘 모두 기억하는 그 만남이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찾아내 끝까지 따라가 뭔가 사이를 만들었을 거라고. 왜? 라는 물음에 그냥, 제가 많이 좋아하니까요. 답변을 덧붙이며 부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활짝 웃었다. -그러게, 나도. 라는 대답에 그 말이 듣고 싶어서요, 라는 수줍은 마음을 또 한껏 숨긴 채로.

나 또한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하지만. 조금 덜 거울을 보고, 약간이나마 외모에 갈 관심을 덜어내길 바라는 꼰대니스를.

내 눈의 꽃은 누구의 눈에도 보석이라.

주문이라는 언어를 현현시키는 것처럼, 문장과 단어가 육화되기를 얼마나 기다려왔던지.

408.

시간을 쪼개어 굳이 다녀온.

아름다운 것을 보고난 이후엔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 외국의 미술, 박물관 관람을 하고난 뒤 한 끼도 안 먹는 경우도 - 것은 느즈막히 생긴 고질병이라. 이차원의 한 면을 삼차원의 실로 채워 다시 삼차원 한 면의 벽으로 만드는 그 기개와 과감함, 빛바랜 색조마저도 목마르게 좋아서. 찬찬한 관람 뒤 도록을 사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까르티에전 예약과 주문해두었던 냉동식품 꾸러미를 모두 취소했다.

이토록의 아름다움이 곁에 있는데 어떤 무엇이 더 필요한지.

숨가쁘게 좋았고 어쩌면 꿈인 것 같은 기억을 안고 주말 내내 출근을 하며 순간순간 아, 그거 좋았지. 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

가는 어깨를 감싸고 있던 슬립드레스라던가 빈티지 귀걸이, 앞이 뾰족한 슬링백. 늘 둥글게 말려있는 묶음 머리의 흔적과 은은한 그림자가 떨어지던 조형의 반지, 위상수학적인 목걸이, 윗면이 좀 더 두터웠던 안경테와 살짝 빗물이 어려있던 귓볼이라던가.

예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잔뜩 보며 먹고 마실 수 있어 더 즐거웠던.

내리는 비와 젖은 우산을 떠는 행동마저 즐거웠습니다.

팬레터를 간직하고 있다는 최애의 이야기를 떨리게도 이야기하시는 그 수줍은 태도와 헤밍웨이적 스픽이지 바를 거론하는 그 취향의 당당함이, 말을 뗄 수 없는 무언가에 또 풍덩 빠져있다는 것을 차마 고백하지 못하는 저의 거리감을 조금 한심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엇비슷한 연배에 매우 흡사한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그 화제와 생각마저도 같아도 즐겁고 달라도 흥미로웠기에, 조금 안나 카레리나 생각을 했네요.

잘 쓰고 잘 먹겠습니다. 모쪼록 남은 공연도 행복하시길. 찾으신 귀고리가 제 기억에 남은 목걸이와 즐겁게 어울리시길.

귓볼에 뜯긴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한 때 많은 곳에 구멍을 냈었고. 콧물로 코를 막고 밥 먹기가 불편해 혀와 입술을 막고, 그럼에도 아 있었었지 하고 일 년에 한 번쯤 X-ray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배꼽링. 한 때는 손가락 팔목 귓바퀴 목덜미까지 주렁주렁했으나 자주 물에 닿고 타인을 만지고 전화를 받아야 하니 시계 외엔 많은 것들을 빼놓게 되었고. 사실 지금도 악세사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너무나 아름다운 타인의 취향은 타인의 것으로 있는 것에 만족하기에 내가 굳이 껴보거나 소유하길 바라지 않게 됨. 내 것들도 충분히 넘칠 만큼 많아서.

좋다고 느낀 것들은 여전히 좋았고 - 코앞에서 바라보는 잘 연마된 발성과 행동 언어가 - 인물에 맞춰 지나치게 도식화된 말투와 언어에서 음, 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소년처럼 무구한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푸른색 스팟라이트를 보며 떠올린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얼굴.

-하나쯤은 사고싶은 시리즈였으나 신품을 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단종 이후 어쩌다 출장을 간 공간에서 드물게 올라온 중고 매물을 발견하고 한 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생각보다 무거운 봉투를 받아 셈을 치르고 다시 두 시간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며 어떤 생각에 잠기고.

시간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뭔가 떠오르면 바로 사거나 금방 포기하는 편이지만. 구매까지 드물게 오래 욕망하는 물건을 만나게 되면 이 물건에 따라붙는 내 시간과 물건의 금액, 망설임, 구매 이후의 감가상각을 오래 계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