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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뒤 카페에서 음료 주문하고 15분 정도 아무 말 없이 앉아 각자의 생각에 잠겼던 순간이. 난 닥터 스트레인지 시퀀스의 사운드 디자인 - 신력과 마력, 추리력ㅋ의 충돌 - 이 너무 좋아서 그를 복기하고 있었고 모님은 토르가 지닌 육체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모든 씬이 마음에 들었다고.
찬찬히 덧붙일 생각은 있지만 일단은 신화적 매력을 Hela에게 모두 빼앗긴 반신이 지닌 인간적 매력을 최상급으로 보여주는 지상 위 영화라는 생각이 우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신에 대한 인간의 해석, 그리고 재창조.
이유조차 타인이 붙여줘야 하는 케에 대한 관심이 드문 것은 제 비위가 약하여. 어쨌든 스타크의 약점을 드러냄, 과 라우페이슨의 약점을 과시함, 의 차이는 꽤나 흥미롭더군요. 그 탄탄한 디딤을 딛고 턱을 당긴 스타크가 원하는 것이 보다 깊은 내면의 진짜 감정, 애정을 빙자한 진짜 나를 알아줘, 의 연민이라면 바닥조차 무너진 라우페이슨이 원하는 것은 적어도 겉으로나마 잘 포장된, 실로 왕의 자질을 지닌 나에 대한 외경과 절대 닿지 않는 이를 향한 동경 - 공포와 별반 차이도 없는 - 이라는 사실이. 둘의 공통된 정서가 인정, 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입을 막고 싶어지고.
그렇기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저 무너진 채 완성되어 있는 배너 박사에게 마음이 가는 수 밖에.
언젠가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지만, 그 길게를 정리하다 스스로 지쳐버릴 것을 알기에; 기억해두고 싶은 것들 몇가지만.
지금까지의 미디어가 표방하는 여성의 우정이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일방적 위로의 역할이거나, 질시와 선망을 숨긴 그럴싸한 겉포장, 혹은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윈 없었다, 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디딤과 성장의 발판이 되어주는 여성의 우정 - 저는 '써니'의 핍진함에도 아쉬움이 큰 터라 - 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그런 거 없다, 는 선입관으로 공고하게도 자리한 작금입니다. 문화가 그 시대의 향유층을 닮아있는 것처럼 그 향유층, 즉 대중 또한 정도 이상 매스미디어가 표현하는 소위 대표 문화의 양양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들의 미디어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한들 결국 한 시대와 그 향유층, 그리고 대중, 이 모든 인민을 아우르는 것 또한 매스미디어, 곧 보편적 문화로 대변되는 대중 매체이니까요.
크든 적든 문화에 이바지하는 이들이 그들의 창조, 혹은 창조물이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동일합니다. 모두가 어떻게든 손에 쥔 것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이해하고 나누어라, 는 지나치게 요원한 소망인 듯 하야 저는 언제부터인지 한국의 제작진들에 의해 기획된 영화를 대부분 피하게 되었습니다. 배우의 사생활 때문도, 홍보의 현장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 누구 하나 거르지 못한 - 헛소리에 지쳐서도 아닙니다. 잠시나마 제가 몸 담았기에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중을 자신의 시선 이하로 폄하하고 낮추어보는, 제작진들의 내가 너희들, 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고압적 태도 - 드러내놓고 나눔이 아닌, 그저 보여주고 부러움을 사기 위해 감추어버리는 - 가 정말 짜증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작진의 깔봄은 주로 쉽게도 지갑을 열어주는 여성 관객에 집중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돈은 우리로부터 거두며 인정은 중년의 남성 평론가, 혹은 남성기를 표방하는 아마추어 씨네필들로부터 얻으려는 제작진들의 뻔한 태도에 질려버린 관객이 저 하나는 아니리라 확신하면서도 그들이 올려온 수많은 개가에는 저 또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취향은 여럿이며 비난받지 않는 취향 또한 적이 드문 편이니까요. 저는 언제나 등장인물인 여성과 그를 대하는 관객을 동등하게 다루는 감독을 기다려왔습니다. 우리를 존중하면서도 이야기 속 여성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고,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는 그런 이야기꾼, 혹은 제작진 말입니다.
그리고 구심점은 이 작은 중국 영화에서 비롯됩니다. 언젠가 저는 남성화된 여성의 멋짐에 대해 거론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여성다운 것, 남성다운 것. 어떠한 방식이건 그 인물다운 방식이 가장 멋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제게 이 영화는 이야기 속 인물다운 것의 멋짐, 그 관계, 여성이 이룩하는 우정과 성장과 디딤, 남성 조연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훔쳐가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관객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반향까지 치밀하게 계산하여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어린 시절의 두 친구와 그 사이의 남성, 멋대로 엇갈리는 연정과 사모, 연민의 감정들. 고래부터 수없이 다루어졌던 삼각관계를 다시 한 번 불판 위에 올리며 감독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인물들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七月과 安生, 이 두 여성은 서로를, 그리고 연인의 감정을 수도 없이 의심하고 조율하고 감추고 드러내며 관계의 격렬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단 한 번도 서로를 아끼는, 서로의 앞길을 소망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자문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스스로를 자존하는 삼각관계의 여성들을 저는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그렇기에 이들의 애정, 이들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한낱 이성 간의 사정을 짓누를 수 있을 만큼 순정하고, 또 고고해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쩌면 거짓의, 어쩌면 진실일 후도 있는 뒤바뀐 인생에 대한 웹소설은 지금까지 차분히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관객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말과 내용을 지닌 영화를 이미 하나 알고 있지요. -Atonement. 허나 후자가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영화에 대한 모든 죄책감과 관객이 지고 가야할 무거움을 그 화자에게 몰아넣는 실로 대단한 여성 혐오에 대한 영화였다면, 전자인 七月与安生이 그려내는 결말은 이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아꼈고,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생명을, 인생을 걸 수 있었던 두 사람 중 그저 남을 수 밖에 없던 사람이 떠난 사람에 대한 애정과 경애를 담아 그려낸, 그저 행복한, 행복해야만 하는 어느 인생의 이야기.
늘 그렇듯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지나치게 상투적인 장치들과 과하게 멋을 부린 편집, 홀로 어색한 남자 조연의 연기와 관객들의 반응을 위해 필요 이상 드라마틱한 전개를 부여하는 연출의 과도함이 마음의 돌로 남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 모든 단점을 감내하고도 이 영화가 좋다, 고 할만큼 훌륭한 배우들과 흥미로운 연출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되뇌입니다. -이런 영화를 만나기 위해.
꽃이 진다.
짐도, 거처를 찾는 것에 소비할 마음도 넉넉치가 않아 몇달 고시원에 기거를 했다. 빛이 없을 수록 잘 자는 성정이라 창이 없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지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 옆방의 소란이며 복도의 소음에 신경이 가는 일도 없었다. 일은 일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내 안의 어딘가가 한 풀 꺾인 듯 무언가 와닿지 않고 늘 먼 기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의문은 여전한 채 그저 가만히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눈꺼풀 위의 감각으로 느끼던, 퇴사 전 나와 마주했던 사람의 마지막 얼굴로 벌떡벌떡 잠을 깨던 나날.
그저 곤란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그 흡뜬 눈들.
아주 좋아하는 분들을 만났고, 좋은 음식을 먹었고, 좋은 곳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통 먼 감각 속에서 입 안을 간지럽히던 부드러운 가리비와 포슬포슬한 연근 튀김, 마냥 물컹하진 않았던 조림과 혀 끝을 알싸하게 휘감던 잔술의 맛이 웃고 떠들던 기억과 한데 엉켜 눈 앞이 아찔해질 때마다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구나. 이 감각과 이 기억의 생생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고.
좋은 마음을, 좋아하는 마음을.
응원이라는 단어 하나가 얼마나 가슴 떨리게 기뻤는지.
모님께 받은 꽃을 보며 차를 우릴 때마다 향긋한 꽃잎 위로 잔잔한 다향이 스미곤 한다. 꽃병이 없어 페트병을 사용한 꽃 사진을 다른 모님께 보내자 기막혀 하던 모님의 답장이 날아왔다. 마침 작업 중인 고택이 있으니 여유가 되면 며칠 사용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 문이나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괜찮, 이라는 단어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이어지는 문장들에 눈이 시린다. 네가 선택한 힘듦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난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힘들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한 게 제일 돈 버는 거라고 생각해. 꽃한테도 빛과 바람은 필요하지 않을까.
꽃에게 필요한 빛과 바람.
고택의 창 하나는 아래위가 긴 직사각형으로, 출근 때는 꽃병의 머리 위를 넘나들던 네모난 볕이 퇴근 무렵에는 꽃병 주위를 어른하게 비추다, 손 끝이 서늘해질 즈음에는 마루를 넘어 일렁이곤 한다. 그 볕에 손을 내밀고 뜨끈뜨끈하게 달궈지는 손등을 한참 뒤집다 미뤄둔 책을 읽는다.
花間一壺酒 꽃나무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獨酌無相親 홀로 따르네 아무도 없이
擧杯邀明月 잔 들고 밝은 달을 맞으니
對影成三人 그림자와 나와 달이 셋 되었네
月旣不解飮 달은 술 마실 줄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나를 따르기만 하네
暫伴月將影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함께 있으니
行樂須及春 봄이 가기 전에 즐겨야 하지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 함께 즐거이 술을 마시고
醉後各分散 취하면 각자 헤어지는 거
永結無情遊 무정한 교유를 길이 맺었으니
相期邈雲漢 다음엔 저 은하에서 우리 만나세
-꽃이 진다.
"지켜야 하는 작고 예쁜 것. 나는 남자 중학교를 다녔는데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해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필통에 색깔별 볼펜을 채워 넣고 필기 할 때마다 뭘 쓸지 고민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걸 발견한 친구들이 '여자 같다'고 놀리면서 창밖으로 집어 던진 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그냥 내버려두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때가 자꾸 생각나더라. '그걸 버리지 말걸. 묵묵히 주워올걸.'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을 이 아이들은 지키며 살고 있는 거다. 그게 정말 멋있는 거고."
여자들이 있는 사회니까, 여초니까, 여자들 있는 데가 다 그렇잖아요. 라는 말에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서두를 달며 사람이 아닌 시스템의 부당함에 대한 내 목소리를 키웠다. 내가 공부해야할 몫, 내가 해야 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매 순간 후회없이 일했고 공부했고 이야기했고 눈을 마주쳤다. 그 반향이 어떠하든 변화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옮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각자의 삶으로부터 배워온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약간 달랐을 뿐이니까. 각오한 일이니까 버텨야겠다, 내가 버텨야 내 뒤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말에 남자가 답해왔다. 나는 쉰 쯤에 오로라를 등 뒤에 두고 얼어가고 싶다는 네 죽음을 기억해. 네가 그 말을 할 때 얼마나 간절하고 반짝반짝해 보였는지. 네 죽음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 다만 너는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많이 아팠으니까. 네 남은 시간만큼은 나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네가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쩌면 조금 불행하더라도 나와 함께 불행했으면 좋겠어.
나는 많이 불행했고 언제나 힘이 들었으므로, 약간 더해진 불행과 힘듦이 내 어깨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내가 하지 않았던 내 말들이 무성한 그곳을 나와, 사직서를 쓰고, 우습게도 이 짧은 경력을 기반으로 재취업 자리를 금방도 얻었다. 이전에 비해서는 월급도 복지도 훨씬 적어진, 새로운 직장의 누구도 내 과거에 대해 왜?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는 질문에 무어라 대답을 하고 새로운 유니폼을 받았던 그 오전, 후들거리는 내 무릎이 버틸 수 있을까 자문한 그 점심, 종로 맥도날드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봤던 그 저녁,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비행기표의 날짜를 재취업 전날로 확정한 밤. 이 영화를 봤다.
아이들은 웃고, 울고, 화내고, 또 웃어버리고. 상처를 묻고, 때로는 드러내고, 때로는 감추며. 살고, 살아가고. 많은 것을 그저 베풀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던 선생이 기실 아이들로부터 수도 없는 것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영상화되는 장면에서 봇물처럼 울음이 터졌다. 어쩌면 내 어딘가의 바닥은 누군가의 칭찬을, 격려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남자의 위로가 아닌, 동료로부터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 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안의 무언가가 정말 조금이라도 인정받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쓸데없이 나대며 참을성 없었던' 나로 인해 내 뒤의 기회들은 모두 꺾여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정말이지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어졌다고.
한참 뺨을 닦으며 좌석에 앉아있다 밖으로 나왔다. 꺼두었던 폰을 다시 켜자 알림 몇개가 눈을 아리게 한다. 선생님의 모습을 잊지 않겠다고, 그 앞길에 행운을 빈다고 말해주는 동료가 있었다.
잠시, 그냥 잠시.
-And before I say good night, this night, I need to say thank you. Thank you to the thousands of wonderful professionals at CBS News, past and present, with whom it's been my honor to work over these years. And a deeply felt thanks to all of you, who have let us into your homes night after night. It has been a privilege, and one never taken lightly. To a nation still nursing a broken heart for what happened here in 2001, and especially those who found themselves closest, "in the events of September the 11th." To our soldiers, our sailors, our airmen and Marines in dangerous places. And to those who have endured the tsunami. And to all who have suffered natural disasters, and who must find the will to rebuild. To the oppressed and to those whose let it is to struggle in financial hardship or in failing health. To my fellow journalists, in places where reporting the truth means risking all. And to each of you... courage. For the CBS Evening News, Dan Rather reporting. Good night.
어쨌든 저는 부당함에 목소리를 키운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고, 넌지시 귓가에 들려온 말처럼 스스로 나가야 하는 입장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추후 어쩌면 아주 슬플지도 모르지만, 제가 주어진 이 행운이 온전한 제 것이 아니었듯 다른 누군가에게 돌아갈 기회가, 그리고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만으로 기쁠 것이라 지레 짐작해버리고 마는 오늘입니다.
수도 없이 되뇌입니다. 잃거나 얻지 않는 변화는 없다, 라고.
-굳이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내년이면 남자는 변호사 시험을 치른다. 주에 근거한 기반을 선택해야 하는 남자는 비로소 우리의 이상한 신혼이 너무 길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평생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나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도 병원에 있으니 느끼지 않아? 함께 하는 시간의 양은 절대치로 잴 수 없다는 거. 짧은 수도 길 수도 있는 시간의 양보다 나는 그냥 지금 함께 있을 내 사람이 필요해. 가능한 돌려 말해주는 남자의 상냥함과 우유부단을 알고는 있지만, 생의 정착이란 단어를 품은 적 없던 나는 당황하고 당황하여 화살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만다.
이 과정들이 네겐 오로지 희생 뿐이었어? 남자는 그저 얼굴로 대답하고, 나는 다시 답할 언어를 잃고.
누군가 말한 기억이 있다. 너처럼 멋대로 사는 애가 힘들 리가 없지. 세상 천지 너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사람도 없어. 네가 힘들다면 말도 안 되지.
내 행운이 온전한 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허나 어떤 노력은 쉬워보일 수도 있구나, 하고.
그토록 어린 아이들도 저마다의 얼굴이 있다.
조금 삭은 분유와 젖은 기저귀 냄새, 덜 들어간 약과 맹렬하게 산화하는 땀 내음. 그 시고 달콤한 냄새를 맡을 때마다 모님이 묘사하던 로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조금은 아기 같던 그 체취'
-우리는 배우의 얼굴에 얼마만한 빚을 지고 있는 걸까요.
야나체크가 체코,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민요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클래식 음악의 형태에 의해 고상해질 수 있는 원재료를 찾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고상해지고 싶었다. 선율은 일상 언어의 음정과 리듬과, 때로는 글자 하나하나까지 들어맞아야 한다. 야나체크는 카페나 다른 공공장소를 조사하여 주위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채보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교수에게 "안녕하십니까"라는 의미로 '도브라이 베체르dobrý večer'라고 말할 때 그는 어미가 낮아지는 패턴, 즉 높은 음표를 한 번 그 다음에 낮은 음표 세 번을 쓴다. 같은 학생이 예쁜 하녀에게 말할 때는 마지막 음표가 다른 것들보다 약간 높아져서, 수줍게 친근한 느낌을 띤다. 그런 미세한 차이에서 새로운 오페라적 자연주의가 나올 수 있다고 야나체크는 생각했다. 그것들이 '사진에 찍힌 듯한 한 순간에 한 존재 전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배우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아주 좋아한다. 내게 하디의 연기란 눈빛이나 모션이 아닌, 자주 감정이 얽히는 가는 목소리.
그 모든 시간과 투자를 아까워하기보단 그 결과에 기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의 가짓수가 늘어나면 내 꼰대성이 강해지는 것이라 생각하여,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내비추지 않으려 노력한다.
진짜 보고싶었던 논문을 읽기 위해 기나긴 과정의 공부를 끝낸 것만으로 지닌 밤이 지나버려 남자에게 짧은 한탄을 내밀자, 너는 참 고단하게 살지, 라는 답변이 돌아와 그저 짜증스러운 아침.
누군가 감정을 원할 때 내가 평가를 들이민 적은 없었던가.
밤을 지새운 날이면 언제나 찾아오는 두통이.
야만과 미신에 휩싸인 유년에 질려 21세기적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던 나는 관상과 손금, 띠, 성명학, 출신지, 별자리 및 혈액형별 성격과 기숙사설 등등을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태여 그 화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없지는 않지만.
각오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나날이 고민이 깊어가는 즈음.
병원에 있을 수록 느끼게 된다. 대내외로 성공했다, 라 일컬어지는 여성들이 얼마나 완벽 - 결혼을 했다면 아내, 며느리, 어머니, 심지어 모든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성격까지 - 에 대한 강박을 지니고 있는지를.
소중한 것을 미리 만들어두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환경이 내 전부가 아니라, 누군가가 망치고 괴롭히고 긁어내릴 수 있는 것은 내가 지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다시 새롭고, 좋아지거나 혹은 마음 둘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내 일과 아무런 관계없이 그저 무겁고 다정한 책을 읽고 싶은 마음.
아직 Dunkirk도 못 봤는데;_;
순간을 놓치면 기억은 침잠한다.
재활과 인수인계와 고함과 짜증과 격려와 호소와 안도와 염려와 고난을 등에 인채 병원으로 잡혀 들어왔으며; 신규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터라 향후 몇달 간은 포스팅이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겪은 일상의 빡빡함으로 말미암아 돌아올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기는 것 또한.
저는 제 지난 시간과 과거에 기대고 있지만 저 스스로를 믿어본 경험은 드물어, 일단 목표로 했던 곳까지만이라도, 라는 희망 섞인 - 모님의 글귀처럼 저 또한 희망보다 잔인한 살인자를 알지 못합니다 - 느슨함이 제가 쥔 것의 전부로군요.
제가 근미래와 뺨을 스치는 나날에 좀 더 익숙해진 뒤 다시 뵐 수 있는 기회가 있길 소망해봅니다. 한국은 제가 기억하던 것보다 시원하고 맑은 날씨네요. 다시금 가까워질 수 있어서 기쁩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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