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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자신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는 일만큼 기이한 객관화가. 


인간은 상상력을 지닌 동물이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진을 두려워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그 일로 얼마나 벌고, 누구의 선망 혹은 경멸을 받든. 저는 언제나 스스로가 하는 일 - 그렇기에 일이 없으면 자존이 무너지기도 - 에 대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 그 일에서 통채로 도려진 듯한 작년 몇달이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눈을 낮추고, 공공기관 몇군데에 입사 지원을 하여 그 중 한 곳에서 최종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현 대통령이 제창한 블라인드의 수혜를 몸소 받은 입장인터라 저보다 뛰어난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뺏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그 다음을 위해 제가 버티고 개선해야 할 길이라는 마음을 다져봅니다. 오늘 하루는 이 생각만으로 저는 배부르게 행복할 것 같네요.


염려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온전합니다, 모쪼록 무탈히 웃는 하루 이시길 바랍니다.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비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고, 소비에트인이 된다는 것은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은 용어상 모순이었다. 권력층은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을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 논리가 있는가? 그들이 그에게 여러 가지 방식과 표현으로, 음악 관료들과 신문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대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였다. 용어상 또 하나의 모순이었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 - 우리 존재의 음악 - 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35.

-소유한 얼굴과 부여되는 이미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밤이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으면, 빛조차도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된다.


모쪼록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34.

-그의 차에 탄 채로 이런 질문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내가, 어쩌면 그가 술이 결정해 주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날 저녁 내내 서로가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술기운이 결정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와인 병을 따거나 음악을 바꾸면서 시선을 돌리는 그를 떠올리며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시 내 마음에서 질주하는 생각을 파악할 것이고 그도 똑같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내나 나 자신을 위해 와인을 따르면서 마침내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그가 나보다 더 나 자신에 가까웠음을. 오래전 침대에서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었을때, 삶의 모든 갈래길이 제 역할을 다 한지 오랜 후에 그는 내 형제이자 친구, 아버지, 아들, 남편, 연인, 나 자신이 되고 또 영원히 그러할 터였다.


"나도 너와 같아. 나도 전부 다 기억해."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당신이 전부 다 기억한다면, 정말로 나와 같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택시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삶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장난으로도 좋고 나중에 불현듯 생각나서라도 좋아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를 돌아보고 얼굴을 보고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


호명, 인지와 동시에 혀끝에서 구르는 우리 관계의 의미.


"People forget what you say, but they remember how you make them feel. Warren Beatty. And right now, you make people feel like you're gonna shoot them. People don't like you. But that's okay. Since love and fear can hardly exist together, if we must choose between them, it is far safer to be feared than loved. That's Warren Beatty as well. No, it's not. It's Machiavelli."


기대는 배신당하고 의도는 희석되는데다 비현실적으로 말랑한 결말이 저를 좀 아프게 했지만, 초췌한 얼굴로 더비를 피워 올리며 나는 미친 사람이고 그런 나를 납득시키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그냥 내 능력이나 믿어, 라 주장하는 Bullock의 연기 하나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왕될 수 없는 자를 왕으로 옹립하는 모든 그늘의 조력자들. 현대의 선거전이야말로 가장 첨예한 홍보의 경연장이라 이야기했던 옛 동료의 언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Kill Switch에 Marlohe까지?

33.

서사란 관중 앞에 선 이야기꾼이 지녀야할 가장 큰 무기이긴 하지만, 때로는 인간과 삶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수천 수만의 이야기를 - 비록 기승전결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허나 탄생과 죽음 외의 온전한 시작과 종결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 대신할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욕심을 내고, 그렇기에 되풀이하여 다루어지고, 관점에 따라 시선을 틀지만 큰 방향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인류 역사상 인간들, 의 품위가 빛을 발했던 몇 안되는 순간을 다루며 감독은 수많은 개인과 집단을 빌어 자신을 털어놓습니다. 


짧은 연결의 순간을 지니는 플롯 셋의 큰 뿌리를 통해 감독은 이런 일이 있었다, 라는 여느 에피소드로 마무리됨이 아닌 인류사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인 개인의 신념이 집단을 이룬 상태의 호전성, 그에 부가된 긍정성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삶이 지속되는 한 어디에도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 이런 감독이 전무후무한 조커를 만들었고 - 우리는 또한 저열한 존재이기도 허나 때로 신념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고결한 존재이기도 하다, 라고. 


저는 언제나 전자쪽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그 위로와 연설에서 밀려오는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장미가 가장 아름다움은 지당하고. 


제가 배우라면 정말 한 번쯤은 욕심을 내었을. 


지금까지의 전작이 그러했듯 감독이 이끌어가는 전개를 쉽게도 예상했음에도 최대한 스스로의 목소리를 절제하고 인물들을 이야기한 것 또한. 그렇기에 오히려 이 낯설고 새로운 - 익숙한 얼굴들이 주는 묵직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배우들이 부각된 것이 저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배경 음악은 문제가 많았지만 사운드와 편집의 합이 무척 좋더군요. 언뜻 거칠 수도 있는 편집의 앞뒤를 굳건하게도 떠받치는 무게감 있는 사운드.   


이런 젖고 서늘한 스코티쉬 금발 미인 조종사가 Afternoon, 을 한다고 왜 아무도 내게;_;?


조종사를 보는 순간 소년의 얼굴에 첫 눈에 반하다, 의 감정이 드리워지는데.


참전해 전사한 형과 과거를 지닌 아버지의 그림자를 동시에 보는. 

32.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잔.


누구든지 벨 수 있는 검.

31.

작은, 그렇지만 내게는 큰 도전 하나를 준비하느라 남자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한 시간 간격으로 동료들과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다시 치우고, 디저트를 사오고, 다음날 아침의 엉망이 된 스튜디오까지 일일히 중계하던 남자는 몇번이고 되묻는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는 언젠가 한동안의 고민 뒤에 남자에게 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사실 나는 내 멍청함에 대한 공포가 정말이지 커. 나는 단 한 순간도 멍청해질 수 없다고 말이야. 어떤, 내가 생각하기에 과분한 자리가 내게 주어지면 나는 도저히 이 자리가 내 것일거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멍청해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는 나 스스로가 이미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였어.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내가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이라는 누군가의 칭찬이 없으면 나는 걸어나갈 수조차 없었던 거야. 지식이란 내가 쌓는 것이지 누군가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잖아. 내가 첫 만남에서 내 외모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어려워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나는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내 외모가 아닌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가꾼,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주길 바랐어. 지금껏 내게 그런 컴플렉스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사실 내 멍청함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두려웠던 거야. 이건 할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이겠지.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나는 전혀 다른 분야를 시작했고- 이제는 지금까지 쌓아온 내 지식이나 인맥이나 외모가 아닌, 내가 일한 결과 하나로 평가받고 비난받고 칭찬받고 어쩌면 호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 나는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나를 좋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누군가 내 지식이 아닌 외모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 스스로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거지. 누군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내가 그럴 수 있을 만큼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지. 무언가가 모자란 사람들을 위해 많이 일하고, 적게 받고, 다시 받은 돈을 나누고.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저 그들과 함께 하는. 나는 지금까지 정면으로 나 자신과 맞선 적이 없었던 거야. 내게도 노력은 필요해. 시간이 필요해. 이기적이란 걸 알지만, 그래서 정말 미안하긴 한데.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러니까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한숨을 쉬었고. 그 시간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 영원히 헤어지게 되어도? 나는 조금 머뭇거렸지.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만약 그렇게 되면 내게 다시 이야기를 해주겠어? 최대한 생각해볼게. 조금 웃었던 것 같기도 하지. 적어도 네 그 시간들에 헤어짐이라는 가정은 없는 거네. 그러면 됐어. 너는 괜찮은 거지? 정말 괜찮아? 그 때와 동일한 어조의 괜찮냐는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현재 읽고 있는 책을 찍어보내거나, 보고 있는 영화의 마음에 드는 대사를 써보내거나 웃는 이모지를 보내거나 하며.


홀로 조용하고, 그러나 외롭지는 않은. 만족스러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굳이 영어 나레이션과 서양인 - 좋은 학벌을 지닌ㅋ - 의 관점을 빌릴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 일본식 사대주의란 - 그 자체로 완성된 삶의 모습이지만 메인을 점하고 있는 참치 경매장에서 일하는 여성 중간 도매상은 단 1명도 없으며 부자재 측에서만 겨우 1명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내내 되풀이되는 그들彼ら이라는 표현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또한 감독이 자랑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몇대를 이어 내려온 관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프로. 속는 것은 본인의 잘못'이라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그 켜켜이 겹을 이룬 카르텔이란.


재료의 중요성과 그를 대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룬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경외를 다루고 있음에도 제겐 일본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량한 케릭터, 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는 것에 격세지감. 영화는 잔잔하고 아름답고 서서히 일렁입니다. 다시 월요일을 시작하는 Paterson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감동이란.


제가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왜 굳이?의 장면이 지나치게 많은데다 이런 식의 스토리 텔링이라면 저라면 극영화를 쓰고 그의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CG와 유화를 함께 도입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그저 거대한 낭비.


그림과 목소리만으로 그 배우들을 온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 조금 흥미로웠나. 그 인물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Poldark;_;이 떠오르기도 했고.


"나는 세상이야. 나는 변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모조리 여성 케릭터에게 떠맡기고 + 종국에는 그 부조리를 견디지 못한 소년 케릭터가 그를 없애버리는 정말 기념할 만한 여혐 영화이지만 성장도 뭣도 없고 아 시발 희망이고 뭐고, 라는 감독의 태도와 촬영과 조명, 미술, 시대적 상황에 천착하는 그 취향이 정말이지 좋더군요. 그 디테일만으로 3시간 57분을 버틸 가치가 있는. 


각설하고, 정말 좋았습니다.


리부트 따위로 기존의 인물을 지우기에 급급했던 시리즈들과는 달리 이토록 정중한 - 너무나 지극한 팬이기에 부여할 수 있는 - 디딤으로 마련된 엔딩이라니. 그들은 영원히 남아있는 전설이 됨과 동시에 모든 전설이 그러하듯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스스로는 절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되겠지요. 어떤 질긴 과거를 지녔던 지난 시간들은 닫히고 새로운 인물들을 위한 미래는 열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라면 general도 없앴을 테지만, 일단은 구심점의 역할이. 


레이의 기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또한. 가능성을 지닌 모든 자들, 어쩌면 주어질 수도 있는 기회.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빗자루로 라이트 세이버의 흉내를 내고, 우주선을 타고 싶어하고, 눈에 들어오는 별을 향해 나아가지요. 그 별빛을 손에 넣기 위해. 


특히나 스노크를 썰고 난 뒤 레이와 등을 맞대고 전투를 준비하던 벤 솔로의 모습은 제 올해의 장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선천적 재능이 없는 자들을 보는 관점에서 엑스맨 생각이 정말 많이 난.


길게;_; 쓰려는 마음에서 일단.

30.

어떤 모습이든 스스로의.


블로그 서비스를 접는다고 하더니 도용에 로그인도, 인증도 안되는 상태라니. 이제는 그만둘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누구의 것이든 기록은 남겨져야 한다고 여깁니다. 언제나 저를 가장 괴롭게 했던 과목은 역사 계열이었지만 과거와 미래를 위한 현재, 그 기반의 중요성을 부정한 적은 없었던 것처럼.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지만 제 관종의 마음도 적지는 않겠지요.


접자, 접자는 마음이 일렁일 때마다 Testament of Youth의 Write!라는 대사를 떠올립니다. 시간과 당신, 그리고 나의 증명.


10년만의 네이버는 그렇게 잡풀로 뒤덮힌 폐허처럼 내버려두게 되었네요. 제 흔적을 지우는 것에 강박을 지닌 세월이 깊었던 터라 요철처럼 마음을 긁히는 기분입니다만 저 곳 하나만은 그대로 놔둘까, 싶은 일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몇번의 부침에도 복사 방지를 걸어두지 않은 저 스스로에게 꽤 감탄한 터라;


자주 봬요, 라는 말로 연말 인사를 대신하며. 모쪼록 평안한 나날 되시길.

29.

이미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기회가 되면 반드시 스크린으로. 가진 자들 스스로는 사회주의적이라 생각하는, 그러나 결국에는 시혜적일 수 밖에 없는 오만한 시선 + 자본으로 바른 황홀한 배경에 환장하는 터라 미칠 것 같더군요. 


시스템이 아닌, 아니 그러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영웅이라는 족적을 새긴 몇몇 개인의 아주 위대하고 이상한 이야기. 재미있지만 빻았고 흥미롭지만 어색한 구석들이 적지 않습니다. 시간이 생기면;_; 길게 써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8.

잘 한다, 훌륭하다, 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눈이 가는 배우들이 있지요. 그 배우 개인의 매력이 조성된 인물 바깥까지 튀듯 번져 경쾌하게 적셔오는.


할 수 있는 만큼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조금 더 격조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스스로가 꽤 무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안도와 미묘한 짜증이. 

27.

대학 초년생 시절,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밤샘 작업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 옆으로 당겨 앉은 어느 노인이 팔꿈치로 내 가슴을 찌른 것이다. 나는 평범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잠깐 경계를 늦춰 눈을 감고 있었을 뿐임에도 명백한 추생의 대상이 된 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의 멱살을 잡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소리쳤다. 노인은 당황해했고 무슨 일이냐며 내게 되물었다. 나는 쥔 손을 풀지 않은 채 주변 어느 여자분에게 경찰에 신고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와 그 노인은 해당 역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조사를 받았다. 노인은 무슨 일 때문에 이 아가씨가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오해라는 말을 연신 중얼거렸고 나는 이 사람이 고의적으로 내 가슴을 만졌으며 고소를 원한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했다. 도착한 경찰은 우리 둘 모두의 진술을 듣고 난감해하며 이야기했다. 첫째, 그 지하철 내에는 CCTV가 없어 이 일의 정황을 누구도 알 수 없고 둘째, 일단 아가씨가 이 할아버지의 멱살을 잡은 것은 폭행이며 셋째, 세상에는 이보다 험한 일도 많으니 두 분 다 좋게 이야기하고 끝내시라, 라는 결론이었다. 노인은 기세등등 날뛰었고 나 또한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지만 결국 노인은 훈방되었고 나 또한 별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약 한 달간 나는 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로부터 끊임없는 문자를 받았다.


이 근처 사시네요ㅎ 저도 집 근처인데ㅎㅎㅎ 아 그 학교 다니세요? 저는 어디어디 나왔는데ㅎ 왜 자꾸 수고하라고 하세요 저 그냥 별뜻 없는데ㅠ 저 몇일날 쉬는데 밥이나 한끼 하실래요? 오늘 근처에 순찰 나왔다가 생각이 나서ㅎㅎㅎ 집이세요? 저 안 바빠요ㅎㅎㅎ 동네가 좀 위험하네요 오늘 한 바퀴 돌아드릴까요?


누가 부여한 것이든 일종의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내 신상명세를 알고 있는 자가 자신이 다룬 사건의 피해자였던 내게 이렇듯 사적 연락을 지속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를 만큼 경험이 적고 어리숙한 나이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등지의 우회적인 부정에 불과했다. 결국 집 앞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그 경찰 - 치안이 좋지 않은 동네의 반지하방이었음에 더더욱 - 의 연락을 끊게 만든 것은 내 거절의 대답이 아닌 당시 만나고 있던 애인의 나 이런 거 좀 불편하다, 는 한 마디였다.


그 경찰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내게 주는 호의라 생각했고, 나는 그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 


아주 약간 사적인 영역을 봤다고 하여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 된 양 착각하고 - 수도 없는 화장실 몰카들을 상기해봐도 - ,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집요하게 금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틈을 만드는 것. 어린, 경험이 적은, 보다 가난한, 자신보다 아래인, 혹은 다른 모든 종류의 약점을 찾아 자신이 이용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 여성의 몸에 대한 피해를 일종의 흠으로 받아들이며 보다 우위에 있는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이라는 시혜적 태도를 취하는 것. 자신의 감정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며 이런 내가 좋아해주는, 이라는 표현과 이에 대한 여성의 호오는 그 애정에 당연스레 따라오는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부산물 정도로 취급하는 것.


이토록 비대한 남성의 자아를 만든 것이 가정, 사회, 미디어, 알게 모르게 깔려 있는 문화적 저변이기에. 


언젠가 남성은 자신의 권력과 자신의 좆에 대한 매력을 동일시하기에 패망하기 쉽지만 여성이 지닌 권력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하기엔 사회가 부여하는 검열 - 네가 잘나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 혹은 스스로의 자기 제어가 지나치게 빡빡하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쉽지 않았을 용기를 내신 모든 분들께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