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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거리의 좁힘.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음식을 먹었을 때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이 내겐 그렇게 많지 않아, 어딜 가든 무언가 재미있는 것,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면 그 얼굴들을 위해 덥석덥석 돈을 지불하곤 한다. 이 곳에서 오기 위한 짐을 챙길 때 한껏 쌓아둔 그들의 상미기간과 시간의 때가 묻은 흔적들을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종국에는 쓰레기가 될 것을 알지만, 결국 내 마음과 경애가 이런 소비인 것이라.
어딜 가든 입국심사장의 사람들은 내게 묻곤 한다. 짐은 그게 다니? 나는 조금은 곤란하고, 조금은 불편한 기분으로 응, 이게 다야. 라고.
이 시대의 부의 증명은 곧 공간.
더워 보여, 라는 말에 남자는 난 여기서 대학을 다녔어, 이를 드러내며 웃고. 몇십 년 전에 할아버지가 있던 공간이네, 내 혼잣말에 그 때 있던 가게들이 지금도 있을 거야, 내기해도 좋아. 라 돌아온 대꾸에 나는 새삼 나와 다른 나라를 이고 있는 남자를 실감한다. 아무런 부침을 겪지 않고 몇십, 몇백 년 동안 유지된 가게를 이르는 천진함.
예산의 정도에 따라 가장 격렬하게 달라지는 여행지를 나는 홍콩으로 꼽곤 한다. 장만옥의 무표정한 얼굴과 양조위, 왕가위에 반해 처음 방문했던 열아홉의 홍콩 - 볼 것이라고는 네온 사인과 낡은 거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 과 스물아홉 - 어찌 일설로 - 의 홍콩은 명백히 다른 공간이었으므로.
누구도 책임질 권리가 없었던, 다만 일어서서 말해야 했던.
내 시간들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자는 항상 타인의 칭찬을 듣지만, 남자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늘 등 뒤의 말을 들어야하는 나는.
There's no Satan.
No God. Only humanity. Only me!
May God forgive you, Frankenstein! May God forgive you.
-Come to me. I am your brother. Oh, my brother Henry, forgive me. I have wronged you.
Out of the way, Victor! Out of the way!
For this is not life. This is not life- you are not life.
이런 작고 미친 영화들이 주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 너무 좋음;_;
-아름답지도 고아하지도 않은, 그저 미래를 준비하는 그 단단한 얼굴들.
특별히 쓰지 않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일들을 약간이나마 겪으며 이번 일만 지나면, 이번 일만 지나면- 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 길어지고 말았네요. 언젠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육체를 지탱하는 것은 정신인가 노력인가 육체 그 자체인가, 라는 주제를 꺼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제 몸을 버티게 하는 것은 육체에 쌓아둔 과거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되는 즈음이기도.
인공 관절 대체술을 받은 뒤 재활을 받을 시간이 없는 제 상황을 고려하여 통증과 혈전을 예방케하는 약물을 꽤 오랜 시간 복용해왔고, 여러가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무릎이 덜그럭거리는 증상을 한동안 내버려 두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올라타야 했던 비행 기압과 피로의 영향도 있었을 테고. 이 무릎으로 축구라도 했어요? 라는 문장에 배알이 꼬여 옮긴, 약간은 더 익숙한 나라에서의 법적 관계자가 제 겨드랑이 아래에 자신의 어깨를 디뎌주는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재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조금씩 걷고 많이 이야기하고 더러 화를 내고 자주 부채질도 하면서, 5분 간격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30분쯤 고민한 답장을 쓰고 제 땀과 기름과 울화에 찌든 시트가 바뀌는 동안 색이 달라져가는 병원 앞 거리들을 멍하니 바라보곤 합니다.
덥네요.
아깝게도 시간은 흐르는데. 이토록 쉬어야 하는 나날들이 짜증스럽기도 또 기쁘기도 한, 이상한 나날입니다.
우리 둘 중 하나에게 익숙한 나라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허니문 같아.
개인적으로 허니문은 정말 낯설거나 아주 친밀한 곳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응, 그렇지만 너와 내겐 보통이 그런 것이었으니까.
나는 늘 내 안의 언어를 1이라 상정한다. 그리고 그 1안에서의 모국어와 외국어의 비율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태생적으로 언어에 대한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면 1.5정도까지는 도달하지 않을까. 허나 그렇지 못한 내 안의 1의 분포는 0.4의 한국어와 0.3의 일본어, 0.2의 영어와 나머지를 두고 다투는 중국어와 러시아어, 베트남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라오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약간의 네덜란드와 스위스, 오사카와 교토, 나고야와 큐슈 사투리 같은 것들. 그리고 무언가가 증가할 때면 다른 무언가의 비중이 줄어들곤 해서, 남자와의 대화 사이에 섞이는 영어와 한국어 단어들이 아쉬워지는 이유 또한 이와 동일하다. 내가 지닌 열망만큼 내게 감각이나 재능이 있었다면.
한 때 내가 체류하던 공간에서의 go와 come, 상대를 높인 you와 격식을 갖춘 me를 표현하는 단어는 동일한 것이라, 어느 정도 그 언어에 익숙해진 뒤의 나는 날더러 가라고 하는 것인지 상대방이 오겠다고 하는 것인지를 몇번이나 되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거리를 표현하는 양양은 내가 아닌 상대가 중심이다. 응, 네가 있는 방향에서 나한테까지는-
정말 좋았다. 언어가 나타내는 문화와 그 문화가 깃든 언어의 각기 다른 표현들, 그 언어권의 사람들이 그를 구현하는 방식들.
지금까지의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And who by fire, who by water,
Who in the sunshine, who in the night time,
Who by high ordeal, who by common trial,r
Who in your merry merry month of may,
Who by very slow decay,
And who shall I say is calling?
And who in her lonely slip, who by barbiturate,
Who in these realms of love, who by something blunt,
And who by avalanche, who by powder,
Who for his greed, who for his hunger,
And who shall I say is calling?
And who by brave assent, who by accident,
Who in solitude, who in this mirror,
Who by his lady's command, who by his own hand,
Who in mortal chains, who in power,
And who shall I say is calling?
최근의 몰두는 Leonard Norman Cohen.
언제나 걷고 있는 듯, 긴장된 표정의.
추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기를 마시고 그 길을 지나고
사람들의 말들 속에 너의 향기를 찾고 너의 말투를 보고 울죠
白盡餘生髮 單存不老心
栖栖非學楚 切切爲交深
遠夢悲風送 秋懷落木吟
古來聰聽者 或別有知音
몽땅 허옇게 바랜 만년의 머리카락
지닌 것이라곤 노쇠에 굴복 않는 마음뿐이지.
쓸쓸하게 떠도는 건 접여를 배워서가 아니라
깊은 사귐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네.
그리운 님 꿈속에서 찬바람에 실어 보내고
낙엽 지는 소리에 가을의 상념 읊조리오.
자고 이래 귀 밝은 사람 중에서
어쩌면 따로 지음이 있을지도.
-어둡지 않게 그늘진 얼굴. 무척이나 아끼는 종류의.
많은 일이 있었고. 이 일들을 어떻게 한낱 단어로 표현할까, 하다.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이 일들은 결국 내 안의 태풍으로 잠잠해질 것이라는 생각도.
기실 내가 당신이 잠기는 것을 볼 수가 없어.
가볍게 한 이야기였지. 일반적으로 나는 여권도 외국인 등록증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데. 내가 여기서 교통 사고를 내거나 갑자기 쓰러지거나 의식을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거나 하면 나는 신원 미상의 부상자나 시체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르겠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는 한참 말이 없다, 뜬금없는 시간에 내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거나 했지. 밥은 먹었어? 다 괜찮아? 요즘에도 집 조명은 깜박거리니? 의아해진 내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누군가 신원 미상의 너를 발견한다면 내 번호가 네 휴대폰 제일 상단에 떠 있길 바란다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라는 말을 들었지.
오랜만, 이라고 표현하기에도 겸연쩍인 시간을 흘려보낸 남자와 나는 함께 보내는 며칠을 밑반찬을 준비하는 것으로 소모하곤 했다. 날리는 마늘 껍질을 훼훼 밀며 눈 사이를 모으는 나를 향해 내던져진 간장 배인 몇 마디에 그만 나는 푸르르 웃어버리고. -누가 괴롭히면 그냥 다 그만둬, 참고 견딜 필요 없어. 그냥 그만두고 나한테 와. 스스로를 자신하는 남자의 오만함이 내 가치의 우선순위였던 기억은 없지만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등 뒤의 무언가 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서.
내몰린 등 뒤가 단단할 때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으니.
그리고 이 뜬금없는 순간들에 위로받을 때도.
삼촌 - 근친 살해 - 의 트라우마로 움직이는 동기 자체가 엄청나게 변태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슈가 대디와 귀여운 여인 이야기를 듣고 정말 갈데까지 가는 구나, 라는 의심이 깊어서.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는 히어로가 유사 이래 얼마나 있을까 더듬어보다 제가 그 영화에 마음을 붙일 일은 영영 없겠다 싶었네요. 저의 격렬한 혐오 중 둘이 어린 병사Child Soldier와 대리전쟁입니다.
빛의 분사.
전공이 전공인터라 몇 개쯤 유명한 이름들을 사적으로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전공 교수님이 이따금 거론했던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고 뚱땅뚱땅 작곡도 하고 최근에는 상도 하나 받은 느이 후배, 가 내가 올해의 앨범으로 꼽았던 노래를 부른 가수라는 사실이, 덥수룩한 머리로 눈 앞을 모두 가린채 내밀어진 물음마다 깊게 파인 볼우물로 먼저 대답하던 그 느긋한 사람이 소위 민중 엔터테이너, 였다는 이야기는.
올곧고 흔들림 없는 애정을 받은 이들을 망치고 싶지 않다. 사랑받음을 아는 사람의 기준은 정말 귀한 것이므로.
각자 다른 모든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선 하나를 마련해 두는 것,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의 높고 낮음이 국가의 현재를 좌우하고.
-나는 육친의 마음보다 적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했고, 친우에게 줄 것보다 적에게 줄 것을 고민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행동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보다 적들이 내 공격에 대해 보여줄 반응이 더 궁금했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위대한 전사라 말할 때, 그들은 내가 적을 더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구원자라는 찬란한 이름을 선물할 때, 나는 복수심에 찬 약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상실했다. 나 또한 약자였기 때문이다.
일정한 결의 그저 격렬한 미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은 한계가 있고 분명히 닳는다, 닳아간다. 그렇기에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라고.
-아직도 이따금은.
나도 엄청나게 스스로를 연민하는 타입이긴 한데.
내게 꽤 큰 실수를 했으며 그 실수에 대한 사과보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의 예의로 유야무야 사건을 묻고 지나가길 바랐던 사람이 여전히 나와의 끊긴 인연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하루 날짜를 새어 가며 내가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글쎄, 정말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 서투르게 창작된 글 몇줄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리만큼 현실감이 없는, 그러나 기묘하게 불쾌한.
느긋하고 끈적한.
빛이 모든 것을 부숴놓는 이곳의 색은 매양 흐리거나 먼지를 뒤집어쓴 희미함이어서, 나는 높은 색온도와 깨어질 듯한 선명함, 흰 입김과 뺨을 붉게 만드는 초겨울 새벽 공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후원이라고 할까, 조금 신경을 써서 보살피는 아이가 있었다. 느리게 진행되는 자가면역질환을 앓았고, 부모는 광범위한 약값과 입원비용을 부담하는 일, 그에 더불어 나빠지기만 하는 아이의 상황을 거의 포기했다고. 그 아이의 어떤 점이 특별히 마음이 들었다거나 다른 과정으로라도 나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병원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지금 내가 받는 월급은 내 생활 주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이지만 이 곳에서는 그 의미가 적지 않았기에. 어쩌면 가벼운 마음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 그냥 때와 시기와 사람이 적당히 맞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
처음 아이를 만나러 간 것은 후원을 한지 세 달째 접어드는 달이었다. 굳이 얼굴을 볼 필요가 있을까, 내내 생각했지만 병원 측의 간곡한 요청과 현지 병원의 상황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잘 꾸며진 병상 위에 단정하게 앉은 아이는 울긋불긋한 얼굴로 내내 나를 보며 웃었다. 내가 하는 어떠한 언어에도 대답하지 않던 아이를 대신해 담당의가 슬쩍 속삭였다.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이곳의 언어로 말을 건네도 아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가볍게 내 손을 쥐었다 놓는, 그 뚜렷한 감촉이 기억에 남았다.
그 뒤 몇번인가 더 방문을 했던가. 이따금은 인형이나 장난감을, 대부분은 가벼운 먹거리를 사들고 가 아이와 나눠 먹거나 함께 자동차를 굴리곤 했다. 여전히 아이는 말이 없었다. 다만 자주 웃었다. 나는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곤란이나 당혹 따위를 어렴풋이 느끼곤 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낯설고 어려운 어른에게 잘 자란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는 아이 특유의 엇갈린 강박 같은 것들. 그리고 어제 병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아이는 더이상 나를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왜, 라는 내 물음에 담당의는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아이가 점점 더 나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슬픔과 기쁨의 반응은 이따금 타인과의 나눔으로 공유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은, 하나의 존재가 느끼는 고통만은 누구와도 함께 공유할 수 없다. 다만 혼자 견뎌야 하는 혼자의 몫으로,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느낄 때 가장 격렬한 고독을 느끼곤 한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내가 될 수 없다는.
나는 네 고통 하나 나누지 못하고, 그저 너를 알고 싶어했지.
내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생각이, 미안함이, 내 자만과 이기심이, 고통 하나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 깊고 얕아서.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하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신이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내 좁은 식견이 닿지 않는 곳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예상치 못한 신.
무지는 이렇듯 신을 만들고. 지나치게 모자라기에 앎과 지식을 지향하는 나는 매일 매일 내 인지가 미치는 곳의 신을 죽여나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만큼 잊혀졌기에 새로이 탄생하는 신도 있겠지만.
6월부터는 짧게라도 하루 하나씩 포스팅을 하자고 생각했는데. 여러가지로 말미암아.
이따금은 나도 본다. 자주는 속내를, 더러는 겉모습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로 인해 네가 영향 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
그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지금 이 시간이면 모든 사람들이 말들-당나귀들-염소들-염소들-벌레들-암탉들-고양이들-개들과 함께 깊이 잠들어 있겠지. 그런데 나만이 잠들지 못하고 들어 본 적도 없는 거리를 걷고 있구나.
사람의 시각의 지평이 얼마나 제한된 것이든간에, 그의 상상력은 경계선을 모르는 법이다. 자기 마을 밖으로 한 번도 나가 본적이 없는 한 남자라도 저 멀리 별나라까지 닿을 수 있는 상상의 세계 전부를 창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지 않고도 사람은 세계의 다른 쪽 끝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런 산보를 할 때마다 그는 눈앞에 아무런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가끔 그는 줄에 매어진 개 한 마리, 아니면 담장 곁으로 달려가는 고양이 한 마리를 지나치기도 했다. 이처럼 동물이 없는 낮선 풍경이 그를 우울하게 했다. 그는 그 동물들이 아예 없는 것인지 신비스럽게 감춰져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이 그 거리들과 그가 건너온 쓰레기장 어딘가에 있으면서 그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했다.
-어쨌든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WW를 봤음. 상영관 문제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편집이 상당히 튀고 컬러 선정이 ???였지만 퍼스트 어벤져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영화라는 느낌은 있었음. 허나 여성 중심의 영화에 나오는 남성 케릭터는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에게 빠져들 - 페기의 엔딩이 마지막까지 로저스와의 얽힘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새삼.
영화라는 단어의 어두에 '상업' 이라는 말을 붙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영화는 혼자만의 예술이 아님이 자명하고. 이 영화를 본다, 는 선택은 나의 것이며 보고 난 후의 무거움과 더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음 또한 나의 죄책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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