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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면식은 있다 최근 급격하게 가까워진 어느 분이 계신데. 무척 좋아하고 동경하는 분이지만 풍요를 타고 자라나 외국에서 석박을 밟고 한국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직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행복을 상상하기 힘들다는 그 분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 때가 있다. 잠시 내 고시원에 들렀다 마주 앉은 카페에서 힘들게 힘들게 꺼내신, 세상에 난 그런 공간이 있는 줄도 몰랐어. 그 말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던 내 당황 만큼 그 분의 세계도 좁았던 걸까.
드문 휴일이나 내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의 집이나 좋은 레스토랑, 재미있는 공간에의 초대를 건네곤 하시는데, 오늘은 혹은 이번은 집에서 쉬겠노라 정중한 답변을 돌려드릴 때면 실로 의아한 반응이 직설적으로 닿아오곤 한다. 그 방에서 쉰다는 것이 가능한 거야, 정말?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데다 모든 낯섦은 익숙해지길 마련이고 전 제 이런 삶을 즐길 수 있는 만큼 오래 누추했으니까요, 라는 말을 입안으로 밀어넣으며 대꾸한다. 그냥 제가 피곤해서요. 다음, 다음에요.
당신을 향한 내 호감과 나에 대한 당신의 호감이 서로가 지닌 환경과 배경과 자리와 안목에 대한 미묘한 경멸의 임계를 넘지 못하는 때가 오면, 우리는 헤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연인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게, 그저 사회에서의 가는 인연 하나가 끊어진 것마냥 건조하게.
-언젠가 다른 모님과의 대화가 문득. 모님의 취향이 이것까지는, 의 하한선이었다면 내게 취향은 이것만은 기필코, 의 상승지점이었다고.
그 많은 뒷말과 폄하의 시간에도 단 한 번도 관객의 시선을 피한 적 없는.
The Death Cure를 봤습니다.
내 입맛에도 정말 맛있는 것과 이건 뭐지? 를 번갈아 먹었고, 영화에서조차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시시각각으로 반복되었기에 가능한 좋은 점만 추려 적으려 노력을.
1. Lee의 연기는 여전히 문제가 많으나 1편과 비교한다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단순히 비중이 적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2. Brenda의 액션과 발성이 무척 좋았습니다. 더 비중을 주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3. Thomas는 그 Thomas로 쉼없이 뛰고 결심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후회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많은 희생을 낳으면서도 끝까지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제겐 좋은 점도, 싫은 점도 잔뜩이었네요. Teresa에게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기회가 수도 없이 부여되니까요.
4.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이 치열하게도 두드러지는 것이 참으로. 보다 넓은 것을 볼 수 있는 어른은 먼 숫자를 이야기하지만 아직 덜 자란 아이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5. Gally 나왔을 때 비명 지름.
6. Newt... 동조도 감염도 변화도 여남은 삶도 죽음 - Teresa의 것과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아 관객의 감정 이입조차 어리둥절하게 만든 - 도 ???였지만 마지막 편지가 준 울림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7.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이었던. 나의 죄, 나의 영혼. 그리고 이제는 없는 너의 목소리, Newt.
8. Eva는 아슬아슬했지만 Janson이 좋습니다. 워낙 제가 좋아하는 얼굴과 연기이기도 하고.
9. 대열차강도의 오마주에서 시작되는 시퀀스부터 감독이 작정을 했구나, 싶었지만 퍼부은 자본에 비해 플롯은 빈약하고 이야기의 설득력은 떨어지며 - 씬과 시퀀스의 강약 조절 문제가 심각함 - 인물들은 어이없는 구성으로 사라집니다. 애쓰는 배우들의 모습이 아쉬울 정도였네요.
10. 감독조차 결정짓지 못한 Teresa의 행동에는 그 어떤 당위도 명분도 없고. 완전히 옳지도 나쁘지도 자신의 일에 신념을 가지지도 온전히 아이들을 배신하지도 못하는 모습들에 더불어 두 번째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11. 수많은 연구원과 장비를 두고 왜 저런 효율 떨어지는 방식을?
12. 일은 아이들은 이루고 일장 연설은 어른이 해대는ㅋ
13. 촬영은 심심하고 사운드는 무난합니다. 별 재미가 없었네요.
14. 1편의 장점은 대부분 사라진대다 완결이라는 느낌조차 - 우리는 헝거시리즈의 걸출함을 기억합니다 - 없는 어색한 결말이지만 그럼에도 장점이 완전히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온전한 세계를 이루고 난 뒤 Thomas가 읽어내리는 Newt의 편지와 그 눈물, 홀로 세워진 비석 위의 이름들에 그들이 밟고 선 희생을 기억하는 관객들이 있지요. 지금까지 이 시리즈를 잘 따라와준 관객을 믿는 젊은 감독입니다.
15. 기이하리만큼 좋았던 1편, 개성은 엿보였던 2편, 미묘한 3편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 젊은 감독의 이상과 순수함이 저는 이상하게도 싫진 않았었네요.
16. 우선은, 감독의 다른 영화를 기대해봅니다.
튤립을 선물하고 싶어 약속을 잡자 하면, 당신은 여느 때처럼 호탕하게 웃어주시련지요.
-보는 것만으로 드라마를 상상가능한.
It used to feel like heaven
It used to feel like may
I used to hear those violins playing heart strings like a symphony
Now they've gone away
Nobody wants to know the truth
Until their hearts broken
Don't you dare tell them
What you think to do
Till they get over
You can only learn these things
From experience
When you get older
I just wish that someone would have told me
Till it happens to you
Till it happens to you
Till it happens to you
어떤 선배는 말한다. 솔직히 나이 많은 후배가 들어오면 우리도 편하지는 않지. 사측에서 어떤 의미로 뽑았는지는 알겠는데, 일단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래. 불편하지. 또 너무 스펙이 좋으면 그냥 잠깐 있다 나갈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선배가 이야기하기도 한다. 듀티 동안 해결해야 할 일 자체가 너무 많고, 막내가 부담해야 할 잡다한 일은 또 더 많고. 나이 먹은 신규는 어렵다, 는 말은 편하게 시키고 혼내고 부려먹기에 불편하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해요.
아무런 생각이 없는 나를 가운데 두고 수없이 오가는 설왕설래들.
-반듯한 이마와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 고집 센 턱을 가진 전형적인 오스틴의 얼굴이라 생각했던.
내가 부러워한 소설가들의 목록. 김해경, 줄리언 반스, 폴 오스터, 스티븐 킹, 로맹 가리...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다른 자아를 내세워 쓴 소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쓴 소설을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던 십대 후반부터 나 역시 친구에게 편지 따위를 보낼때는 '衍'이라는 서명을 남기곤 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이상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한 이 한자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건 다른 이름으로 글을 쓴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내게 글을 쓴다는 건 애당초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던 셈이다.
가명으로 소설을 쓴 다섯 작가 중에서 줄리언 반스와 폴 오스터만을 따로 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두 개의 이름으로 소설을 쓰되, 본명으로는 너무나 진지한 소설을, 가명으로는 대중적인 문체로 추리소설을 썼다는 점이다. 줄리언 반스는 댄 캐버나라는 이름으로 네 권의 추리소설을, 폴 오스터는 폴 벤저민이라는 이름으로 [스퀴즈 플레이]라는 추리소설을 출간했다. 이 일의 교훈은? 추리소설로 돈을 번다는 건 줄리언 반스나 폴 오스터에게도 힘든 일이라는 점. 하지만 돈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이번에는 줄리언 반스, 한 사람만 남겨놓겠다. 그는 내가 몹시도 부러워할 만한 일을 하나 더 했는데, 그건 소설가가 되기 전 사전을 편집했다는 이력이다. 이십대 초반 그는 편집자로 일하며 삼 년 동안 옥스퍼드영어사전(OED)의 4권짜리 보충판에서 C에서 G까지의 표제어들의 뜻과 초기의 용례 등을 편집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내게는 그런 이력 하나쯤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소설가에게 단어란 화가에게는 색채와 같은 것이니까. 사전을 편집했다면 다른 소설가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가졌다는 뜻이니까.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었는데, 이미 하고 있었구나.
사진이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면, 회화는 다른 시대 - 주로 과거의 - 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좋아합니다. 사진이나 영상에의 동화와는 사뭇 다른, 객관적 견지에서의 고요한 경도.
타인의 다정이 뼈에 저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편의점 메론빵을 좋아한다고, 스치듯 말한 몇 마디를 기억해 언어도 낯선 나라에서 산책을 다녀올 때마다 메론빵을 사오던. 몸둘바를 몰랐던- 나를 죽일 것만 같았던 그 무시무시한 다정함.
현재의 깊이감보다 미래의 발전이 기대되는 가수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황홀하죠.
Yeah, I hurt you, and you hurt me
Yeah, we did some things that we can never take back
And we tried hard just to fix it
But we broke it more
And so I guess some things are not meant to last
Is it too much to ask
For tonight
Let's love like there's no goodbyes
Just for tonight
Pretend that it's all alright
‘부양의무제.’ 현행법은 가난의 책임을 모두 다 개인에게 떠넘기기 바쁘다.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두 가지다. 동정하거나, 비난하거나. 결국, 모두 ‘네 탓’이라는 거다. 네가 무지하고, 무력하며, 무능해서 안 됐지만,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게을렀던 건 모두 ‘개인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노동을 열심히 했음에도 가난하다면 그건 네가 분수에 맞지 않게 낭비를 해왔다는 증거다!
이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일종의 모욕이다. 고되게 노동하며 살아온 가난한 노인에게 주어진 삶은 두 가지뿐이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동을 하거나, 멍하게 방 안에 앉아 TV를 보거나. 오늘도 TV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새로운 기계가 끊임없이 소개되고, 그들의 자녀들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점점 기계가 대체하는데,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모욕당한다. 모욕당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은 내 방뿐이다. 주기적으로 리모델링을 해줘서 멀끔하고 비도 새지 않는 안전한 내 집, 내 방. 인간(人間)이란 단어에 ‘사이 간(間)’ 자가 들어간 건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관계’와 그 안에서 받는 인정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복지정책은 그 관계를 끊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기저에는 가난에 대한 깊은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가난한 개인을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방에 들어앉을 ‘누군가’가 계속 바뀔 뿐이다. 방 안에서든, 밖에서든 이제는 ‘노동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그려내는 힘이 필요하다.
-더이상 사랑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런 글을 고민한다.
안와가 깊고 턱이 뚜렷한, 그리고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책망할 수 있는. 그 윤곽과 태도가 미친 듯 좋았지.
현장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내 언어도 깎여간다. 아주 조금씩, 사소한 것부터.
그때의 그 이상한 열기가 그립지 않다는 것도 거짓말이겠지.
오늘 처음, 완만하게 굴러떨어지는 듯한 환자의 죽음을 봤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어느 선배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선생님.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연신 손을 놀렸고 선배 또한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 무거운 소란.
모든 끝과 처음이 그렇듯, 포기하는 마음에도 각오는 필요하다.
최근 봤던 햇살 같은 영화들 틈으로 독야청청한 좆같음을 자랑했으므로 기록. Rampling의 고고한 연기를 제외하고는 장점이 1도 없음. 특히나 엔딩ㅋㅋㅋ 아 그러세요. 날 배신한 여성에게 부여되는 평생의 불행은 당연한 것이지만 곧 죽어도 깐깐한 노년 남성의 자기반성에는 박수를 줘야겠지요.
이제 슬슬 워킹타이틀식 때깔 고운 영국영화에 대한 희망을 버려야할 듯도.
-뒷모습마저 노래하는 듯한.
상당 부분을 배우가 지닌 이미지에 기대고 있지만 영화 정말 좋더군요. 상상했던 것보다 유머와 이야기의 밀도가 깊습니다. 언어가 지닌 운율과 의미를 아는 감독이 영상과 편집, 사운드를 다루면 이런 영화가 나오겠지, 라는 생각을.
전혀 다른 플롯과 맥락입니다만 시와 언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Paterson이 떠오르기도.
너의 입술산이 생각보다 높았다거나 네 눈매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운 윤곽이었다던가, 네겐 아이보리보다 오프 화이트가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거나, 내 머릿속의 너보다 언제나 내 눈앞의 네가 훨씬 더 미인이었다거나. 이 모든 내 생각과 현실의 너 사이의 괴리를 접어두고도 너는 내가 언제 어느 때고 친한 친구, 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연이 깊고 벽이 낮은 사람이었다고.
시작되는 너의 새로운 관계를, 시간을, 막을, 그리고 너의 결혼을 축하해.
간만에 학교에 들러 교수님을 뵙고, 아직도 졸업 안한(...) 혹은 위로 진학한 동기들을 만나고 받은 것들. 학생 공모 디자인 다이어리 시절에는 나도 몇몇 동기들과 의기투합하여 아이디어를 냈던 과거도 문득. 줄임말을 달력에 떡 하니 박아놨길래 - 내가 기억하는 옛 총장은 저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 케이아츠는 포기했나 싶었는데 다이어리를 보고 흠. 모두가 칼아츠 짭이냐며 투덜거렸던.
대부분 영상이나 디자인북을 탐독하기에 줄글로 된 책을 읽는 이들이 드물어 대기 예약 없이 하루 열댓권의 책을 빌려 삼사일 만에 내리 읽곤 했던. 그렇기에 다독으로 졸업 때까지 도서관 근로장학생 - 경쟁이 치열했다 - 신분을 유지할 수 있던 기억도.
지금보다 치열하게 희망하고, 절망하고. 더 자주 울고 웃고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했지.
언젠가 모 동기의 야 솔직히 우리 뭣 좀 있지 않았냐? 물음에 코웃음치며 우리가 뭣 좀 있었으면 넌 이미 나랑 사귀고 있거나 헤어진 상태일 거임, 대꾸할 만큼 열정적으로 연애를 했고. 내 방 호수가 어디인지 모를 만큼 기숙사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며 생활하다 보증금 50, 100만원짜리 반지하와 옥탑을 전전하기도. 그런 내 생활을 불쾌하게 여기던 애인도 몇 있었지. 좀 제대로 된 곳에서 살면 안돼? -월세 내줄 거 아니면 입 다물어, 라 윽박지르긴 했지만 그런 누추함이 질기게 부끄러웠던 시간도 없진 않았고.
밥을 먹기 위해 선배 동기 후배의 현장을 뛰던, 가난이 그저 내 죄인 것 같았던.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모는 내 모습을 흥미롭게 여겼지만, 나는 대치동의 학원 강사였던 시절 차가 끊기면 돌아올 택시비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그냥 모르는 척 웃었지.
언젠가 모님이 탐라에서 거론한 서울, 서울살이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 모든 지방러의 꿈이 아닐까. 신분증에 아로새겨진 서울시의 주소를 가지는 것, 그리고 그 주소를 2년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을 지니는 것. 내가 온전히 나로서,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내 직장과 내 수입만으로 그러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나를 이룩하는 것.
이런 나 자신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또 몰라주기를 바랐던 새파란 시절의 나를.
태양은 그 환한 빛으로 어리석은 날 가르치네
당신은 따뜻한 온기로 얼어붙은 날 데워주네
언제나 아무 말 없이
그대 손으로
그대 손으로
-온기에 리듬이 있다면 이런 운율일 것이라 생각한 적이.
WW를 향해 언제나 부신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무척 좋았지요.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격렬한 아름다움.
배우 특유의 능글능글함을 잘 활용한 흥미로운 케릭터였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그 마지막에는 불만이 많습니다. 저는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1회용 여성 케릭터의 엔딩에 주어지는 내면으로의 침잠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요.
또한 배우의 개인적 매력을 한껏 살린 최상급의 케릭터이며 - 감독이 치밀하게 계산한 인물과 연기 연출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란 - 흥겹게 연기하는 것이 눈에 보여 특히나 더 좋았지만, 극와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비중이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더군요.
소비되는 1회용 남성 케릭터를 다루는 더 많은 매체가 나와야하지 않을까, 하고. 미디어가 늘 그렇듯, 활용 뒤에 흐름이 있으며 호응이 있고 연구가 뒤따른 뒤 결론이 맺어지지요.
자신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는 일만큼 기이한 객관화가.
인간은 상상력을 지닌 동물이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진을 두려워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그 일로 얼마나 벌고, 누구의 선망 혹은 경멸을 받든. 저는 언제나 스스로가 하는 일 - 그렇기에 일이 없으면 자존이 무너지기도 - 에 대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 그 일에서 통채로 도려진 듯한 작년 몇달이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눈을 낮추고, 공공기관 몇군데에 입사 지원을 하여 그 중 한 곳에서 최종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현 대통령이 제창한 블라인드의 수혜를 몸소 받은 입장인터라 저보다 뛰어난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뺏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그 다음을 위해 제가 버티고 개선해야 할 길이라는 마음을 다져봅니다. 오늘 하루는 이 생각만으로 저는 배부르게 행복할 것 같네요.
염려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온전합니다, 모쪼록 무탈히 웃는 하루 이시길 바랍니다.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비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고, 소비에트인이 된다는 것은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은 용어상 모순이었다. 권력층은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을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 논리가 있는가? 그들이 그에게 여러 가지 방식과 표현으로, 음악 관료들과 신문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대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였다. 용어상 또 하나의 모순이었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 - 우리 존재의 음악 - 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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